"고향 땅 호미곶서 문화 가꾸고 글 쓰며 살다 가고파"

서상은 전 영일호미수회 회장이 최근 호미바다예술제에서 지역 발전 공로패를 받은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호미곶에 태어나고 자라 호미 숲과 문화를 가꾸고 이제 호미곶에서 살다 가려고 합니다”

일순 어리석어 보이지만 우직하게 한 길을 가면 큰 성과를 거두는 일을 흔히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한다.

한 개인의 꾸준한 열정과 적극성, 집념이 지역 사회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는지 잘 설명하는 고사인데 포항에도 이 말에 딱 들어 맞는 이가 있다.

서상은(82) 영일호미수회 초대 회장은 ‘호랑이를 상징하는 한반도 범 꼬리인 포항 호미곶에 털과 같은 나무가 무성해야 국운이 융성해 진다’며 황무지였던 포항시 남구 호미곶 해안가에 곰솔(해송)을 심은 지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해안가에 조성된 호미숲해맞이터 기념비.
처음에는 ‘바닷바람이 심해 어차피 나무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을 것’,‘시장·군수까지 지낸 이가 미쳤다’라는 주변 따가운 시선이 많았다지만 점차 그 뜻에 공감하는 이가 늘어 호미수회(虎尾樹會)를 이루고,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6만~7만 그루의 해송이 기암괴석 해안 절경과 어우러지며 솔숲을 가꿨다.

오랜 소망대로 이제 바닷바람을 막고(방풍림·防風林]), 멋스러운 좋은 자연경관을 관광객들에게 제공하며(풍치림·風致林), 호미 반도 물고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어부림·魚付林)을 제공하고 있다.
청전 서상은 전 영일호미수회 회장이 조성한 해송숲 너머 너른 영일만 바다가 펼쳐져 있다.
고향 호미곶을 지키는 한 그루 늘 푸른 굽은 노송(老松)을 닮아 가는 서상은 전 호미수회장을 11월 첫째 토요일, 육림(育林)의 날을 앞두고 호미곶에서 만났다.

1935년 호미곶 구만리에서 태어난 청전(靑田) 서상은의 삶은 호미수 운동과 호미바다예술제 등 사회·문화 활동을 비롯해 행정가(공무원)와 수필·시인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초등학교에 조성된 자신의 문학비 에서 서상은 전 영일호미수회 회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보초등학교 등 학업을 마치고 첫 직장으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고등고시 큰 뜻을 뒀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과 가정 형편으로 공직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울릉도와 포항의 공보 공무원으로 시작해 이후 관선 영일군수·선산군수·달성군수·경북도식산국장·내무국장·구미시장을 두루 거치고 퇴임했다.

이제 특산물 홍보·관광객 유치·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등 ‘축제가 대세’인 시대다.

그는 반세기도 훨씬 전인 1964년 당시 영일군 공보실장으로 재직 시 송라면 보경사에서 ‘보경예술제’를 개척했는데 포항 지역 축제·문화제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경주 신라문화제‘화랑·원화 선발대회’에 각 시·군 후보자를 출전시키라는 도의 지시를 받고 이들을 인솔하며 참관하며 ‘우리 포항 지역도 좋은 자원이 많은데 남의 잔치에 불려 다녀야만 하나’라는 불만 어린 마음과 애향심이 불탔다고 한다.

‘보경사 좋은 관광 자원을 홍보하자’며 전국농악대회와 백일장 등 행사를 마련했는데 당시 경북도지사가 극찬했다.

현재 포항 정체성, 관광 자원이 되는 일월문화제와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 등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또 다른 중요 장면은 영일 군수로 재직하던 1983년 1월 1일 새벽 5시 KBS라디오 중앙방송 새해 첫 방송 당시 신년인사 때다.

이제 상식이 된 ‘포항 호미곶=호랑이 꼬리’는 예전에는 일제 잔재로 ‘토끼 꼬리’로 불렸다.

아나운서도 오프닝 중 대보(현 호미곶)를 ‘토끼 꼬리’로 무심코 언급하자 ‘범 꼬리’라고 천명하며 주어진 5분을 다 써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호미곶개칭운동’이 전개됐고, 장기갑은 호미곶이란 행정지명을 얻게 된 기원이 된다.

청전은 또 1990년부터 호랑이 꼬리에 털을 심는 ‘호미수운동’을 전개해 매년 봄 해변에 해송을 심는 것과 함께 ‘숲은 울창하면 문화·예술 또한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해 ‘호미바다 예술제’를 올해로 24회째 개최하고 있다.

흑구문학관을 건립하고 호미문학상·흑구문학상을 통해 호미곶을 지역 문화 예술 텃밭으로 가꾸고, 중국 조선족 문학상도 제정해 통일 한국과 문화 교류를 긴 시선으로 먼저 또 멀리 내다봤다.

군 단위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1987년 6월 문화부로부터 준박물관으로 지정된 영일민속박물관도 그의 손때가 묻어난 곳이다.

서 군수는 부임 이후 군청과 읍면사무소 직원들에게 ‘사라져 가는 민속 자료를 1인당 10점 이상 수집해라’고 강력히 추진해 민속자료를 수집해 조선 시대 흥해 동헌 건물을 활용해 영일민속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지난 1983년 착공돼 1985년에 개관한 호미곶 등대박물관이 오늘날 국립등대박물관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고향 포항, 특히 호미곶에 끼친 그의 ‘나무 그늘’이 그만큼 커 보인다.

신라 시대 포항 지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베 짜는 기술과 농업 등 각종 문화를 전파한 연오랑·세오녀를 포항 정신문화의 뿌리이자 일월사상의 상징으로 발굴하며 연오랑 세오녀 동상을 호미곶 광장에 조성하고 ‘연오왕 세오비 추모제’도 매년 지내고 있다. 지역 문화에 사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여든이 넘은 지금도 ‘폐교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자’,‘우리만의 혼례문화가 필요하다’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그의 눈은 반짝이는 청년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1963년 ‘신세계’ 수필, 2006년 ‘현대문예’ 시 추천 등 수필가과 시인의 행보도 꾸준히 걷고 있다.
포항 대보초등학교에 조성된 청전 서상은 문학비.
청전 서상은 문학비는 호미곶 대보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그곳에 새겨진 ‘호미곶 별사’ 시(詩)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 이 땅에 태어나 바람과 돌과 살다 다시 흙과 나무로 돌아가리니...(중략) 사람들이여 훗날, 이 나무 그늘에 앉아 역사만 얘기하지 말고 그대들도 푸른 나무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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