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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사람은 여러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중 특별히 한 부분의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둔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감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희·노·애·락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미각을 통해 삶의 기쁨을 얻는 것이고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코가 느끼는 감각에 그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다. 또한 음악가라면 그 어떤 감각보다 청력에 그 특별함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음악가는 아니지만 듣는 일을 그 어떤 감각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들려오는 한 소리 소리들을 전부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듣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무의식 환자라도 청각만은 살아있어서 주위의 소리들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의 보호자들이 침상 옆에 모여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는 말이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됐다”,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셨다” 등등의 말이었다. 그들의 등을 떠밀어 병실에서 나가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도 그 보호자들은 아랑곳없이 옆에서 음료수를 마시거나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환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보자. 죽을 때가 다 된 내가 침상에 누워 있다고 가정해 보자. 평균 수평이 80세 이상으로 늘어났으니 난 85세쯤 되었을 것이다. 난 의식을 잃었고 내 바람대로 ‘심폐소생술 금지’ 서약에 보호자들이 사인도 했다. 나는 아무 의료처치도 받지 않은 채 덩그러니 침상에 누워있다. 그런데 생각처럼 나는 빨리 죽지 못한다. 내가 곧 죽을 줄 알고 슬픈 얼굴로 내 병실로 찾아왔던 가족들이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커피를 사러 가고 누군가는 긴 의자를 찾아 떠난다. 그래도 나는 참 지루하게도 죽지 않는다. 호출이라도 받을 줄 알고 병원 내에서 기다렸던 가족들이 나누어 집으로 돌아가고 몇 사람은 교대 시간까지 기다린다. 남은 가족 두 사람이 내 옆에서 대화를 나눈다. “아이구 이제 그만 편하게 가시지, 무슨 미련이 이렇게도 많은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전부 바쁜 세상에 얼마나 더 이렇게 있어야 될까” 등 나를 원망하는 말들이 자꾸 늘어간다. 어쩌다 한 사람이 그래도 참 열심히 살다 가는 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한사람의 말에 금방 묻혀버린다. “갈 때 되면 가야지…….” 난 눈을 감고 웃을 것이다. 그러다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내가 슬프게 웃으면서 흘려야 하는 눈물이라니! 나는 내가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 적어도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 참 잘 살았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앞으로도 언제나 사랑할 거야, 당신이 없더라도 우리는 당신을 언제나 기억할 거야, 당신이 언제나 그리울 거야, 같은 말들…….

나는 지인들에게 내 귀가 백 개쯤 된다는 자랑을 하곤 한다. 무엇이든 잘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군가가 내 말을 잘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의 말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이여! 부디, 오늘 내 말을 잘 들어주세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떠나는 이에게 귓속말로 그 말을 들려주세요. 그 순간 떠나는 이가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큰 기쁨의 눈물일지는 말 안 해도 아는 일, 그러니 당신, 오늘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슨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가요?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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