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충만은 기쁨이다. 이것은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고 오직 현재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 느낄 수 있는 충족감이다. 이러한 내적인 충족감과 기쁨이 마음속에 샘솟을 때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우리는 이웃과 주변 세상에 자연스레 미소 짓게 되고 베풀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절로 흘러넘칠 것이다. 이것이 곧 의무감 없는 사랑이다. 따라서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고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요 존재는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이 1970년대에 펴낸 수필집 ‘무소유’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그 느낌이 또 남다르다. 나이 들면서 젊은 시절 읽었던 고전이나 좋은 책을 다시 잃게 되는 것은 나이에 따라 다른 경험을 느낄 수 있어서 참으로 좋은 일인 것 같다. 이번에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다시 읽으면서 무소유와 사랑에 대한 어느 노스님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감동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울타리가 없는 산골 외딴 암자에 ‘밤손님’이 내방했는데 밤잠이 없는 노스님이 정랑엘 다녀오다가 뒤꼍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밤손님’이 뒤주에서 몰래 쌀을 한 가마 가득 퍼내 지게에 짐을 지워놓고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주었다. 겨우 일어난 도둑이 힐끗 돌아보았다. 노스님은 ‘아무 소리 말고 내려가게’라고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다. 이튿날 아침, 스님들은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고 야단이었으나 노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노스님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 밤손님은 암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위 노스님의 일화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장발장은 가난으로 인해 조카들이 굶게 되자 그들을 위해 빵을 훔치다 걸려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출소한다. 장발장은 전과자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저주하던 중 미리엘 주교의 도움으로 주교관에 머물다가 주교의 은식기들을 훔친다. 그러나 도망 중에 잡혀 다시 한번 감옥에 갈 처지에 처하지만 주교는 장발장의 죄를 묵인하고 은식기에 은촛대까지 주며 장발장의 삶을 바꾼다.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두 이야기지만 결국 내용은 같은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고 다만 그 표현만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本來無一物’이란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었다는 말이다. 노스님이나 주교는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도둑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도둑을 감화시켜 도둑의 삶을 바꾸게 하였던 것이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아끼던 물건을 도둑맞았거나 잃어버렸을 때 무척 괴로워하게 되는데 이로써 소유관념이라는 게 얼마나 지독한 집착인가를 비로소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물건을 잃으면 마음까지 잃는 이중의 손해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존재의 삶,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의 삶은 슬픔과 고통이요 존재의 삶은 기쁨이라 했다. 기쁨은 떨림이요 경외다. 이러한 기쁨에서 생명력이 출렁이고 사랑의 감정이 솟구친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원한도 미움도 용서한 곳에 마음은 승화되어 해결이 되고 마음에는 참 평화가 올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거룩한 교회나 사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밟아가고 있는 매 순간의 삶에 있다. 종교는 거룩한 그 무엇이 아닌 어린아이 같은 생동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 현재에 존재해야 하고 존재는 곧 사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