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향해 일편단심 절의 지킨 올곧은 선비의 향기 가득

봉화 도계서원, 강당 공극루 전경 및 내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로움이 세운 서원.

경북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에 있는도계서원(道溪書院·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7호)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던 의인들의 충절의 도(道)가 서린 곳으로 1610년 (광해군 2년)건립 당시에는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1435~1528)의 위패만을 모셨으나 이후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1426~1457)와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1457)을 추가로 배향했고 후에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취사(炊沙) 이여빈(1556~1631)까지 모셨다.
도계서원, 강당 공극루 전경 및 내부
도촌 이수형, 정민공 이유, 충장공 이보흠은 단종을 향한 충절로 생애를 일관한 선비들이니 가히 충절과 의로움으로 서원을 세웠다고 할만하다.

도계서원의 충절과 절의 정신을 오롯하게 보여주는 것은 특이하게도 건물이다.
봉화 도계서원
선현봉사와 교육의 기능을 지녔던 서원은 그 기능에 맞게 선현봉사를 위한 묘우와 강학을 위한 강당, 사제(師弟)가 거주하는 공간 등으로 구성되며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담은 경구로 건물의 이름을 짓고 그 뜻을 이어받고자 함이 보통이다.
도계서원 현판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도계서원의 현전하는 건물 역시 묘우(廟宇)인 견일사(見一祠), 강당인 공극루(拱極樓), 거주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동재(東齋)인 공북헌(拱北軒) 등이 있다.

△견일사(見一祠)-충과 의를 지킨 선현을 모시다.

도계서원에서 배향하는 선현들은 단종에 대한 충과 올바름의 의를 지킨 인물들로 묘우(廟宇)인 견일사(見一祠)에 모셔져 있다.

‘하나를 본다’는 의미의 견일에서 일은 바로 임금에 대한 충과 의를 상징한다.
도계서원 견일사
도촌 이수형은 17세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평시서령이 되었으나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21세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그 후 북쪽을 향한 집을 짓고 평생 단종을 추모하다가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금성대군 이유는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1456년(세조 1)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안치되었다가 그곳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基川) 현감의 고변(告變)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도계서원 견일사
대전 이보흠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443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7년 순흥부사로 있을 때 영남지방의 인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여빈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 또는 감곡(鑑谷)이다.
도계서원 견일사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成均館田籍)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國政)을 마구 주무르고 있다 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옳지 못함을 상소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鑑谷:영주시 부석면)에 은거하며 인수정(因樹亭)을 짓고 후진 교육에 매달렸다.

△공북헌(拱北軒)-단종을 그리는 마음으로 북쪽만을 보다.

논어의 학이편을 이은 두 번째 편인 위정은 그 시작을 “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이중성공지(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로 하기 때문에 위정편이라고 부른다.
도계서원, 동재 거주공간 공북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자기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면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향해 손을 맞잡고 공손한 모양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도계서원 동재 거주공간 공북헌
공자의 말은 덕(德)으로 정치를 하면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임금을 향해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우러러보게 된다는 것으로 북극성을 중심으로 모든 별들이 도는 것과 같음에 비유했다.

공북헌은 조선시대 일반 서원 건물의 형태와는 자뭇 다르다. 거주하도록 된 방 한 칸의 작은 쪽창을 제외하고 열린 공간은 오직 북쪽으난 방과 마루로 들어서는 출입구 뿐 이다.

방과 마루가 마치 2개의 굴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머리를 들고 멀리 바라보면 오직 하늘의 북쪽만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공북헌
보통 마을의 지세는 동남향이며 사람이 거처하는 집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야 마땅한데 공북헌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혀있어 좁고 답답하다.

이런 공북헌의 구조를 두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4654~1725)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수형 선생은 문종이 어린 단종을 부탁한 집현전 학사의 반열에 오른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군신 간의 의리를 다하여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은둔하면서 세조의 신복이 되지 않고 절조를 지킬 따름이었지만, 오히려 평소 거처함에 감옥에 구금된 것보다 더 심하게 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오직 영월의 산만 마주 보았으니 이는 군주를 위해 죽지 못한 신하라고 여긴 것이요, 또한 선생의 뜻일 따름이었다.”

이렇듯 도계서원은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 충절의 정신이 오롯하게 서린 곳으로 그 올곧고 굳센 마음을 실재 건물로 형상화하고 표현한 곳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박문산 기자
박문산 기자 parkms@kyongbuk.com

봉화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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