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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순병원 원장

자신이 스스로 상황을 조절할 수 없거나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면 어떤 감정이 생길까. 분명히 우울증이 올 것이다. 이는 실험을 통해서 이미 입증이 된 이론이다, 실험동물이 회피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혐오스러운 자극을 가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 자극을 이겨내거나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조차 포기하게 된다. 그 후 그 상황을 바꾸어줘도 달리 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학습된 무력감’이라 한다.

사람에게도 이 학습된 무력감은 우울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저는 남편이 일찍 귀가하기를 늘 바랍니다” 우울증 환자가 말한다. “부부애가 대단하시군요. 남편께서 부인에게 참 잘 대해주시는군요. 좋은 일입니다” 의사가 반응한다. “부부애라…그게 아니라, 남편이 좀 더 일찍 귀가해서 얼른 저를 때려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매일 밤을 술에 취한 상태로 귀가해서는 이런저런 트집을 잡다가 결국은 저를 구타하는 겁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발로 배를 차기도 하고, 저는 밤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구타를 피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구슬려 보기도 하고 빌어 보기도 하고 아이를 업고 도망을 가기도 하고… 그러나 결국은 그런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들여 진 것이죠. 밤이 되면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두렵고 무섭고 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적게 맞기를 바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밤이 되면 시계를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왕 맞을 거면 좀 더 일찍 맞고 빨리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남편이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지면 그만큼 불안의 시간이 길어지므로… 지금은 남편도 구타하는 행동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어요.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제는 ‘오늘 밤은 다행히 무사히 지나가는구나’라고 안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이렇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으로는 수많은 이론들이 있다. 최근에는 생물학적인 이론으로 뇌 기능에 그 원인을 찾는 이론들이 힘을 얻고 있다. 즉, 뇌 신경 세포들끼리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전달 물질 중 ‘세로토닌’ 이라는 물질의 활성이 떨어져서 우울증이 온다는 이론이다. 이는 우울이라는 마음의 문제를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의 문제로 치환하여 이 물질을 활성화 시켜 준다면 우울이 좋아질 것이라는 이론이다. 지금 세로토닌을 활성화 시켜 주는 수많은 약들이 개발되어 있고 우울증을 ‘어른 감기’라 칭하며 처방하고 있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이 세로토닌 한 가지만으로 다 설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울증이 잘 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며 자기 자신을 둘러싼 이 세상도 온통 부정적이라고 여기고 또한 자기의 미래도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인지 이론도 있다. 이런 우울증에는 생각하는 틀을 바꾸어 주는 것이 진정한 치료이지 항우울제 약물처방만으로는 큰 호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학습된 무력감’으로 인해 우울증이 온 사람들은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까. 이런 우울증은 세월을 거슬러 가서 처음부터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해 주거나 자신의 힘으로 그 상황을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게 해 주어 무력감이 학습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진정한 치료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불가능하므로 최선을 다해 긍정적인 재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으로 치료의 효과를 기대해 본다.

지금 현재 폭력이나 학대나 괴롭힘이나 갑질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이 훗날 그 사람에게 헤어날 수 없는 엄청난 무력감을 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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