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는 부모의 이혼으로 9세였던 1912년 조선에 있는 고모 집으로 온다. 이후 충북 청원군의 부강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을 목격한다. 가네코는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 약자에 대한 연대의지를 직관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자연스레 아나키스트가 되고 운명처럼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공동투쟁을 시작한다.
일본은 당시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근대정신을 지향하고 있었다. 일본은 동아시아 식민지화를 위해 서구화 되지 않은 동양을 개화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아시아를 삼키려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네코는 ‘식민지의 남자’ 박열을 만나 아나키즘에 깊이 공감하며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 저항한다.
1926년 3월 25일 일왕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법정에 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은 사모관대의 조선 예복을 입었고, 가네코는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이들은 “우리는 조선인이다.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일본 대심원 법원은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 한 순간 가네코는 소리높여 ‘만세’를 외쳤고, 박열 역시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라며 일본 제국주의를 조롱했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 같은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천황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당시로써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을 주장을 법정에서 스스럼없이 외친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후 박열의 선산이 있는 문경으로 유해가 옮겨져 묻히게 된다.
국가보훈처가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인 17일, 가네코 후미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며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가네코는 2004년 애족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에 이어 두 번째 일본인 독립유공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