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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은상] 도래샘

윤희순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은상

경북일보 kb@kyongbuk.com 등록일 2018년11월19일 19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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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혁作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이 있다 거친 흙길을 돌아 돌아서 물길을 놓치지 않고 샘이라는 이름을 얻어낸 도래샘,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온전히 길을 찾아낸 작은 샘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모진 과정을 겪고 새로 태어난 샘의 안정된 모습은 얼굴을 들이대지 않아도 물 내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며 샘의 모습만 감상했던 나였다. 언제부터 샘이 이루어진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해탈의 과정을 겪은 듯하다. 안온한 얼굴에 깊숙이 자애로운 웃음 짓고 있던 그녀가 떠오른다. 돌고 돌아서 맑은 물줄기 샘솟는 도래샘 같은 모습으로 평온한 웃음을 전하던 그녀의 정연한 움직임을 기억하게 된다.

낮은 계곡 물 소리가 안내해주는 산길에 들어섰다. 처음 그 길을 들어섰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녹음이 짙어져 두껍게 내려앉은 산그늘이 온몸을 더듬어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니 잎 새 사이를 빠져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한결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그동안 변해버린 풍경에 내 집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었다. 전과 다르게 잘 다져진 길은 손길이 많이 거쳐 갔음을 짐작하게 했다.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이 만들어 낸 그늘이 오를수록 선경이어서 풍경화를 감상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전 처음 이 산사를 찾았을 때였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무성하였다. 모든 것이 고요하여 살짝 스치는 바람에도 나무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았던 것은 내 마음이 아파서였을까, 사람의 기척도 없는 길을 따라 오르니 절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한 암자가 한 채 나타났다. 인기척에 낯익은 비구니스님 한 분이 두 손을 합장하고 걸어 나왔다. 스님은 차분히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인연 따라 불가에 귀의한 언니였다. 난 가슴의 움직임이 멎는 것 같아 머줍게 서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상상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어떤 자세로 대면해야 할지, 웃음과 울음이 조절되지 않는 낯가리는 아이처럼 굼떠 있었다. 그 사이에서도 비집고 들어 온 언니의 모습은 제대로 일구어낸 맑은 물 넘쳐흐르는 샘이었다. 힘을 실은 웃음은 완연하여 정오를 밝히는 햇살보다 더 광채가 났었다.

이렇게 환생하려고 질긴 속세의 끈을 부여잡고 몸부림을 쳤던가, 아궁이에 장작이 타들어 가듯이 요동치며 버티던 삶의 정착이 이리도 돌아 흐르는 도래샘과 같았는가. 제 몸을 다 태운 안과 겉이 없는 재의 모습이라야 풍파를 잠재울 수 있었을까, 찰나에 스치는 많은 생각에 스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열 살 아래의 동생에게 삶의 고단함 때문에 업이 쌓여 간다는 편지를 부치던 언니를 그때는 온전히 이해를 못 했다. 세속의 집착과 욕심을 버린 언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우화(羽化)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혀 속에 잠긴 말을 뱉지도 못하였다.

명함판 흑백사진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활짝 핀 미소를 띤 언니의 사진을 기억한다. 봄 햇살이 인심 좋게 내리쬐던 때라 블라우스 색깔만큼이나 밝아 보이던 얼굴이었다. 어렸던 난 세상에서 언니가 가장 예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내게 언니는 존재가치가 다르다고 느꼈다. 언니가 하는 말과 행동은 경이었다. 언니가 만들어 준 음식은 무엇이든 일류요리사의 작품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연탄불 뚜껑 위에서 발효시켜 찌는 찐빵의 맛은 지금 어느 빵집에서도 맛볼 수가 없다. 틈만 나면 공부를 하는 언니의 모습에서 선생님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런 언니와 함께 길을 걸어갈 때면 목에 힘을 저절로 줬다. 일하시느라 비워진 엄마의 자리를 충분히 채워 준 언니는 엄마보다 더 가까웠다.

언니는 스물이 갓 넘은 나이에 결혼했다. 내 눈에 예쁘면 남의 눈에도 예쁘게 보였을까, 언니를 따르던 남자들을 어스름이 기억한다. 그 중 준수한 외모에 언니를 편안하게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과 결혼했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한지라, 지나친 애정은 집착으로 변해갔다. 사사로운 일에도 간섭받던 언니는 삭정이처럼 말라 갔다. 언제나 그늘에서 작은 소리로 작은 몸짓으로 생활했다.

결혼 생활 중 언니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간은 책을 읽는 동안이었다. 불경 서적을 탐독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어 갔다. 그래도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언니는 결국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침잠 된 정신을 하나씩 끌어올려 맑은 정신세계로 이르게 하는 길이 어찌 쉬웠겠는가, 사람이기에 지어 놓은 업을 씻어 내기가 가볍지만은 않았으리라. 좌선과 합장으로 마음을 모아 심중의 묵은 때를 하나씩 사위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불가에 귀의한 언니를 만나면서 힘겨움 속에서도 불경 서적을 함께 했던 일, 틈을 내서 절을 다녀오던 일, 그 순간은 가장 밝은 표정이었던 때를 기억했다. 하나씩 맥이 잡히는 생각들이 씨실과 날실이 교직 되듯 정리되었다. 언니를 언니라 부르지 못하게 된 그날, 하늘의 구름은 바람 없이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질러 진 심신에서 드렁칡 같이 얽힌 속세의 인연을 끊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고행으로 수행을 닦아 무소유의 시심을 채운다는 것이 어찌 쉬웠겠는가? 사바세계의 널브러진 풍요의 한 조각도 누리지 못하고 물욕을 버려야 하는 수도승의 길을 택한 언니다.

가부좌한 스님이 법당 앞에 앉아 있다. 목탁 소리와 함께 염불한다. 도량에 줄지어 앉은 신도들의 마음도 하나가 된다. 힘이 들어간 스님의 뒷모습은 아귀 차 보인다. 법당에서 울려 퍼지는 염불에 산속의 모든 것들이 기도하는 것 같다. 청아하게 읊는 예불은 목탁소리와 어우러져 밀려오고 밀려가는 세상의 풍파를 잠재우고 있다. 탐욕의 일생은 회한만 남길 뿐이니 부질없는 욕심은 버리라 한다. 세속의 부귀에 익숙해진 중생들은 무상함을 깨닫고 아파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라 한다. 깨닫지 못하면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심금을 울리고 귓전을 맴돈다.

여명이 밝아 오듯 나의 오감이 하나씩 열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스님의 염불을 따라 하고 있었다. 바라만 보았던 우화의 모습에 나도 젖어 가고 있었다. 여기가 그리도 힘겹게 찾아 헤매던 도래샘이란 말인가. 자신의 힘겨움이 타인에게 위안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물길을 찾아 돌고 돌아 안착한들 숨이 차다 하겠는가, 온전히 솟아내는 샘 같아 염불을 듣는 내내 합장한 나의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 있음을 느꼈다.

각각의 생명을 품고 있는 저 푸른 산은 생각이 깊었던지 갈망하는 인간의 소망까지도 품어 주었나 보다, 생을 분분하게 노래하는 산새 소리와 함께 다른 이들의 비 나리 하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평온한 선율이 된다. 절간 마당에는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특별한 인연으로 스님에게만 안겨드는 고양이다. 염불이 귀에 익었다는 듯 법당 벽에 코를 가슴에 묻고 눕는다. 천천히 제 눈앞에 아른거리는 햇살을 응시하다 손바닥을 핥는다. 녀석도 많은 것을 바라보며 무탈하게 보낸 하루였으리라.

제각각 쓰고 매운 맛을 느끼며 하루를 부대껴온 바람이 한결 의젓하다. 언제 이리도 많은 엽엽의 기운을 간직해 두고 일시에 내뿜고 있는지 산사의 풍경이 속세의 갈증을 잊은 듯 잠시 세월을 내려놓는다. 나무들이 빚어낸 신선한 향기가 온몸으로 전해온다. 절 간 담벼락에 똑똑 떨어져 가득 고인 도래샘이 찰랑찰랑 넘쳐흐르고 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이곳에서 지난 시간을 묻어버리고 피안의 세월을 스님은 쌓아가고 있다. 바람결에 청아한 풍경소리도 산사를 다독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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