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보경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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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혁作

그날은 햇빛이 좋은 가을날 오후였어.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바삭하게 말린 햇빛은 더 말릴 것을 찾는 것처럼 거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바닥과 벽까지 더듬고 있었어. 세상은 고요했어. 수많은 세대가 사는 넓은 아파트 단지가 침묵 속에 잠겨 있었어. 햇빛을 피해 거실의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갔어. 하늘은 몹시 파랬고 하얀 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었어.

베란다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봤어. 걷고 있는 사람 몇이 보였어. 주차장에는 빈 칸에 차를 대고 있는 자동차도 있었어. 그런데 사람들의 말소리나 걸음 소리,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어. 참 이상한 일이었어. 내 귀가 잘못된 걸까? 나는 아아, 목청을 돋워 소리를 내봤어. 아아,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분명히 들렸어. 참 이상한 일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어. 방금 내가 한 말이 또 다시 내 귀에 들려왔어. 내 목소리 말고 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 갑자기 깨끗한 아파트 건물과 새파란 하늘이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장처럼 느껴졌어.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거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어.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서 이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어. 밖에 나가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귀도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어. 신발장 안에 얌전히 놓여 있던 하늘색 운동화는 내 발에 꼭 맞았어. 공원을 향해 길을 걷는 동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어. 공기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산책을 하기 좋았고,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어. 나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갔어.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조용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어. 나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조용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고요를 깨뜨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았어. 머리가 맑아지길 바라며 나온 산책길이었지만 마음이 더 무거워지고 두통이 생길 것만 같았어. 그렇다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고 싶진 않아서 그냥 산책로를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겼어. 삼십 분 쯤 걸어 산책로 끝에 있는 조그만 광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땀도 조금 났어. 나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어.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을 보며, 아, 정말 가을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렸어. 그리고 그때였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의 정적이 갑자기 깨진 것은.

-우리 현이, 잘 걷네, 이리 와 봐! 엄마한테 와 봐!

아이를 어르는 엄마의 목소리와 방울을 흔드는 것 같은 아이 웃음소리, 아빠의 낮은 말소리가 한꺼번에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어. 툭 터지듯 정적의 벽을 뚫고 날아온 목소리들이 반갑고 놀라워 나는 얼른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 광장 저쪽에 유모차 한 대와 소리의 주인공들이 있었어. 돌이 조금 지났으려나, 빨간 패딩 점퍼를 입은 아이가 노랗게 떨어진 은행나무 잎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몇 발자국 앞에서는 엄마가 박수를 치며 아이를 격려하고 있었지. 아이가 균형을 잃으면 얼른 떠받칠 수 있도록 아빠는 커다란 두 손을 활짝 펼친 채 아이의 등 뒤를 따라가고 있었어.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어. 아이가 뒤뚱거리며 엄마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는 동안 엄마는, 우리 현이 잘한다, 잘한다, 높은 소리로 외치며 뒷걸음질을 쳤어. 나는 주변을 둘러봤어. 공원을 산책하는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 소리 없이 자기 길을 걷고 있었어. 그 사람들한테는 아이와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어.

이해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는 게 반갑기도 했고, 귀여운 아기가 어떻게 생겼을지 보고 싶기도 해서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어. 가까이에서 본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보였어. 사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중년 부부가 아이의 친부모가 맞는 건가 의문이 들었어. 아이는 어느새 걸음마 연습에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어. 등 뒤에서 따라오던 아빠가 얼른 아이를 안아 올렸어. 아빠의 품에 안긴 아이의 찡그린 얼굴이 내 쪽을 향했어.

- 아!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어. 아이의 얼굴, 하얀 피부에 눈썹이 유난히 짙고 까매서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그 얼굴은 몹시 낯이 익었어. 어디선가 분명히 본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어. 아이의 얼굴과 부부의 얼굴을 번갈아 봤지만 그들의 얼굴은 조금도 닮아 있지 않았어. 중년 부부와 아이가 친부모와 자식 사이가 맞는지 다시 한 번 의문이 들었어. 그래서였을까, 아빠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모습은 침엽수림 사이에 잘못 뿌리를 내린 가녀린 대나무처럼 불안해 보였어. 아이는 무엇이 불편한지 입술을 삐죽거리다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부부는 그런 아이를 달래며, 현이가 졸린 가보다고, 잠 잘 시간이 아직 안됐는데 잠이 온 모양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남편은 아이를 안고, 아내는 빈 유모차를 밀며 공원의 출입구 쪽을 향해 급하게 걸어가기 시작했어. 아이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공원을 가득 채운 채 조금씩 멀어져갔고, 나는 문제의 뜻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난이도 높은 수학 문제를 받아든 것처럼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기만 했어. 왜 저 아이는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았는지, 저 아이를 예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왜 자꾸 드는 건지, 봤다면 어디에서 본 건지 생각이 멈추지 않았어. 나는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과거에 분명 어디선가 본 사람인데 누군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야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일인데도, 나는 쉽게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어. 작은 광장 한 쪽에 선 채로 아이가 공원을 완전히 벗어나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어.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점점 작아지던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뚝 끊어지고 세상은 또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어. 주변에서 산책을 하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어. 어? 하는 사이 나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바람도 나뭇잎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공기의 빛깔이 희미해지더니 사물의 색이 점점 하얗게 바래버렸어. 그리고 모든 게 정지했어. 시간도 멈췄고…… 그리고 나는…… 내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잘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렸어……



“당신! 미쳤어?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

“제발 그만 좀 하자! 이젠 좀 잊어버리자! 벌써 삼 년이나 지났는데 이젠 잊을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이럴 거야? 우리도 우리 인생을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리고 살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일 년 내내 방구석에 선풍기가 나와 있냐고, 도대체!”

“어떻게 잊어, 우리 인석이를…… 그리고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야, 간섭하지 마!”

“아아아악!”

남자의 고함 소리와 함께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어.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에 있던 나는 급작스러운 소음에 놀라 깜짝 놀라 깨어났어. 나는 여전히 광장에 서 있었고, 하얗게 바랬던 공기는 원래 색깔을 되찾고 있었어. 그리고 그들이 보였어. 방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참고 있는 여자와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남자. 두 사람 주변에는 어지럽게 책이 널려 있었고, 선풍기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남자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어.

“죽은 애는 그만 잊어버리고 애를 새로 갖자고! 근데 당신은 내가 근처에도 못 가게하고 한 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 애가 쓰던 물건이나 어루만지고 있고! 지금이 몇 신 줄 알아? 새벽 세 시야, 세 시! 근데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인석이 물건은 다 버리기로 약속했잖아, 지난번에!”

남자가 책상 위에 있던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들어 방바닥에 내동댕이쳤어. 박스 안에서 레고로 만든 모형들이 쏟아져 나와 흩어졌어. 여자가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어.

“아휴, 내가 진짜!”

남자가 방문이 부서져라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나간 후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조각이 난 모형들을 박스 안에 주워 담았어. 화산 탐사 기지와 우주 왕복선, 그리고 지구 방위대 전차들. 여자는 분리된 미니 피규어의 목을 몸통에 끼워 맞추고는 웃고 있는 얼굴을 들여다봤어. 우주복을 갖춰 입고 산소통을 짊어진 피규어를 우주선 위에 꽂아 상자에 넣은 여자는 뚜껑을 닫고 원래 있던 곳에 상자를 올려놓았어.

방을 다 치운 여자가 울어서 발갛게 된 얼굴로 내 앞에 앉았어.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어. 까맣고 짙은 눈썹과 하얀 피부, 내가 방금 본 그 아이, 중년의 부부와 걸음마 연습을 하던 아이와 똑같이 닮은 얼굴이었어.

어찌된 일인지 나는 다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어. 광장 저쪽에서 아이에게 걸음마 연습을 시키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와. 우리 현이, 잘 걷네, 엄마한테 와, 이리 와, 하는 소리가. 나는 흐뭇한 마음이 되어 그 광경을 쳐다 봐. 그리고 그들에게 또 다가가. 그리고 아까처럼 아빠 품에 안긴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되고, 아이의 유달리 숱이 많고 짙은 눈썹을 보면서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누구와 닮은 건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아. 아까와는 다르게 나는 아이의 엄마에게 말을 걸어. 애기가 너무 이쁘네요. 돌이 지났나요? 라고. 아이의 엄마가 나를 돌아보고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해. 네, 이제 십삼개월 됐어요. 엊그저께 처음 발걸음을 뗐는데 벌써 제법 잘 걸어요. 미소 띤 내 표정에 친근감을 느꼈는지 엄마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해.

-제가 노산이어서 아이가 건강할지 어떨지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근데 건강하게 잘 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러게요. 정말 건강해 보이네요. 누나나 형도 예뻐하겠어요.

-현이는 외아들이에요. 제가 불임이라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어요. 완전히 포기하고 살았는데 기적처럼 현이가 생겼어요.

나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아이의 엄마를 바라 봐.

-그러시군요. 정말 귀한 아이네요. 현이가 너무 예쁘시겠어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남편도 걸핏하면 일하다 말고 집에 와요. 현이는 저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인상이 좋은 엄마는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아이와 남편을 바라 봐. 아빠 품에 안긴 현이가 조그만 손으로 아빠 얼굴을 감싸고 볼에다 입을 맞춰. 아빠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으로 현이의 하얀 뺨에 자신의 뺨을 대고 문질러. 아빠가 아이를 꼭 안은 채 공원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엄마는 내게 인사를 하고는 빈 유모차를 밀면서 남편을 따라가.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의 얼굴은 편안하고 당당해 보여. 나는 이제 마음이 놓여. 조금 전에 아이가 왠지 불안해 보였던 건 순전히 내가 잘못 본 탓이야. 현이는 엄마와 아빠의 흘러넘치는 애정 속에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거야.

나는 광장에 선 채로 또 다시 생각에 잠겨. 현이가 닮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지만 여전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끼워야만 전체가 해석되는 퍼즐을 앞에 둔 것처럼 나는 그 문제에 골똘하게 빠져 들어. 갑자기 여자가 코를 푸는 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자위가 벌건 여자의 얼굴을 쳐다 봐.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는 자신의 자녀를 다른 부모에게 보낸 슬픔과 그 아이의 행복을 엿보면서 느끼는 기쁨이 한 가득 드리워져 있어.

아, 당신! 나를 현이에게 두 번이나 다가가게 만든 게 당신이었구나. 이상한 적막감 속에서 공원으로 산책을 나오게 한 것도,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 것도 당신이었어.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의문, 현이가 누굴 닮았는지에 대한 해답도 결국 당신이 갖고 있겠네, 그렇지?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문제의 해답을 밝힐 생각을 하지 않아. 두 손은 키보드를 떠나 얼굴을 가리고 있고 입술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다물어져 있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키보드 위로 툭툭 떨어져. 당신의 눈물이 내게로 스며들어. 당신의 슬픔이 나를 적셔. 손을 뻗어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나는 당신을 지켜봐야겠다고 마음먹어. 한정된 세상 안에 속한 채 당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당신을 생각하고 느끼며 당신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것뿐이니까.

당신은 내 앞에 꼼짝 않고 앉은 채 남편이 출근 준비하는 소리를 들어. 성취욕이 강한 남편은 업무가 시작되기 전에 토익과 회화 수업을 받기 위해 항상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 인석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남편은 고작 두 달 동안 영어 학원을 쉬었을 뿐이야. 시간이 늦었는지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간 남편은 조심성 없게 문손잡이를 그대로 놓아버려. 남편의 등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온 집안의 문이 문틀 안에서 공명음을 일으켜.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당신이 부르르 몸을 떨어. 당신이 몸을 떠는 건, 사고가 나던 날 인석이가 학원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나가면서 뒤로 닫히던 문소리가 기억나서야. 당신이 몸서리를 치는 건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한 사고’라는 말 안에 ‘진정한 우연’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해. 당신의 마음속에서 남편을 향한 증오의 감정이 솟구쳐 올라.

인석이는 그날따라 소파에서 만화책을 읽으며 늦장을 부렸어. 왜 안가고 그러고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당신에게 물었어.

-엄마, 오늘 하루만 안 가면 안 돼?

당신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어. 당신은 학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또 다시 학원에 가야하는 아이가 안쓰러웠지만, 지금 곧 당신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으로 출근을 해야 했기에 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어.

-힘들다고 빠지고, 가기 싫다고 빠지고 그렇게 살다가 이다음에 뭐가 될래?

아이는 부루퉁한 얼굴로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으로 나갔고, 당신은 아이의 등에 대고 지각할지 모르니 자전거를 타고 가라고 말했어. 쾅! 하고 시끄럽게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어. 그 소리가 당신의 신경을 긁었어.

삼십분 후 당신은 아이의 자전거가 휴지처럼 구겨진 채 학원 앞 사거리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걸 보았어. 누군가가 덮어준 하늘색 점퍼 아래로 삐쭉 나와 있는 아이의 두 다리가 괴상한 각도로 뒤틀려 있는 것도 보게 되었어. 아이의 상체가 있어서 점퍼가 불룩하게 솟아 있어야 할 곳이 이상하게도 평평했어. 검붉은 물이 배어들고 있는 점퍼를 들추려고 손을 내미는데 누군가가 당신의 손목을 잡으며 만류해. 당신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당신의 손목을 잡은 사람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 사람 등 뒤로 길게 나 있는 도로와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검붉은 타이어 자국을 바라 봐. 사고를 낸 시외버스와 경찰차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건널목 근처 길가에 서 있어. 경찰 두어 명과 함께 서 있는 인석의 친구, 승훈이와 세연이도 보여. 저 아이들이 왜 경찰과 함께 있을까 잠깐 생각하다가, 당신은 버스가 서 있는 자리와 아이의 몸이 누워 있는 자리를 눈으로 가늠해. 날개도 없이 날아오기에는 지나치게 먼 거리라고 당신은 생각해. 당신은 경찰의 수신호를 따라 사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도로에 검붉은 바퀴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게 돼. 그리고 그 바퀴들이 자국을 남기는 것은 도로가 패인 곳에 고여 있던 검붉은 웅덩이를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웅덩이와 아이의 몸 사이에 검붉은 줄이 이어져 있는 것을 알게 돼. 사거리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올 때 아무 생각 없이 봐 넘겼던 검붉은 타이어 자국은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밟고 생겨난 거였어. 페이드아웃이 된 것처럼 캄캄해지는 시야 속에서 건널목 신호등 뒤로 <휘낭시에>라고 쓰인 제과점 간판이 환하게 눈에 들어 와. 당신은, 우리 인석이가 저 집 빵을 좋아하는데,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가운 길 위에 누워 있는 당신 아이의 모습이 보였고 그 후에는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뜬 당신은 병상에 둘러쳐진 커튼 바깥의 소음을 들으며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병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손과 발이, 그리고 팔과 다리가 쇼크로 떨려오기 시작해. 몸을 모로 돌리고 다리를 상체에 닿도록 바짝 끌어올리며 온 몸에 힘을 주었지만 떨림은 점점 심해졌어. 당신은 당신의 몸을 제어하고 싶었고 뭐라도 머릿속에 떠올리며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지만, 세찬 폭풍우와 거대한 해일과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분출하는 지진이 한꺼번에 몸을 덮쳐오는 것 같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거칠게 숨을 쉬고 신음을 내뱉고 이를 맞부딪치며 온몸을 떠는 것 밖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어.

신은 내가 들어 있는 노트북을 캔버스 천으로 만든 에코백에 넣어 메고 집을 나서. 남편이 두 동강을 낸 선풍기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내려놓고 정문을 빠져 나가 거리를 따라서 걸어. 당신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동네 중학교 앞이야. 하교 시간을 맞아 교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무리에 길이 가로 막힌 당신은 에코백이 어깨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옆구리에 끼워. 쿵쿵 소리를 내며 조금씩 세차지는 당신의 심장 박동이 내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려와. 교복을 입은 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활달한 몸짓으로 걸어 나오는 아이들을 당신은 물끄러미 쳐다봐. 저 뒤쪽 아이들 무리 가운데서 당신은 언뜻 낯익은 얼굴을 본 거 같아.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을 가진 누군가의 얼굴이 인석이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당신은 심장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란 채 눈을 크게 뜨고 아이들의 얼굴을 정신없이 훑어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당신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당신이 본 모습은 환영이자 착각이라고, 중학생이 된 인석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상상이 현실 속으로 잠시 외출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해. 당신은 다듬어지지 않은 활력을 분출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친밀감과 애정을 느껴. 고통에 익숙해진 메마른 당신의 얼굴에 모처럼 따뜻한 미소가 어려.  

  동네의 작은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당신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식은 커피 잔을 쥔 채 내 앞에 앉아 있어. 당신의 시선은 보도를 굴러다니는 나뭇잎을 향해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내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 그러다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짓더니 키보드에 양 손을 올리고 자판을 누르기 시작해. 

  이제 나는 마트 안에서 카트 손잡이를 잡고 서 있어. 롯데 마트나 이마트처럼 제법 규모가 큰 마트야. 나는 상품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살 것들을 카트 안에 담아.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려. 나는 돌아다 봐. 내 앞에는 활짝 웃고 있는 다정 엄마가 서 있어. 다정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이야. 나는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내가 그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저절로 알게 돼. 나는 삼년 전에 그녀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내 아이와 다정이는 같은 유치원에 다녔어. 다정이네와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아주 가깝게 지냈어. 우리는 아이들은 잘 크는지 집안은 편안한지 서로에게 안부를 물어. 미소와 웃음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지만 내 마음은 편안하지 않아. 나에게 닥치는 이런 상황들이 당신의 상황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당신 자신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의 근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야. 이제 곧 나에게도 불행이 닥칠 것만 같아 내 마음은 계속 불안정한 상태야. 다정 엄마와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을 하며 헤어지려고 해. 그녀와의 만남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에 안도하려는 순간이었어. 

  -참! 혹시 건주 엄마 소식 들었어요?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던 그녀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뻔 했다는 표정으로 급하게 말을 꺼내. 건주네 또한 우리와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던 사람이야. 건주는 다정이와 내 아이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같은 유치원엘 다녔기 때문에 역시 잘 알던 사이였어.

  -아니요. 아무 얘기 못 들었는데 왜요? 건주 엄마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다정 엄마의 표정이 심각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소식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어.

  -건주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고요, 건주 엄마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건주 이모한테요? 

  건주의 이모 또한 우리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어. 그녀에게는 건주와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었고, 나는 동생 집을 방문하는 건주 이모와 건주를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러 번 마주쳤어. 다정 엄마가 말을 이었어.

  -건주 이모가요, 얼마 전에 자기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어요. 자그마치 11층에서요.

  -네? 투신을 했다고요? 아니 왜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이라는 듯 잠시 주저하다가 나온 다정 엄마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다 두근거렸어.

  -건주 이모한테 아들이 있었잖아요. 성욱이라고...... 아마 이 소식도 못 들으셨을 거예요. 이사 가신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서요. 성욱이가 이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떴거든요. 그 뒤로 성욱 엄마가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대요. 건주 엄마가 자기 언니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지 뭐예요.

  내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던 두 모자의 모습이 선연하게 기억에 떠올랐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성욱 엄마는 유난히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그리고 짙은 눈썹이 꽤나 인상적이었고, 성욱이도 그런 엄마를 빼박듯 닮아 있었어. 내가 아는 척을 하면 수줍은 듯 엄마 뒤로 숨던 아이, 그 아이를 보면서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고 해도 믿겠다며 성욱 엄마와 함께 웃던 게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했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 삶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는 걸까. 왜 이런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가슴이 저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문득 당신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와. 당신은 나를 마트 한가운데 세워둔 채 키보드에서 두 손을 내려. 맑은 물에 먹물이 떨어져 섞여드는 것처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어두운 우울이 올라와 당신 가슴을 까맣게 물들이는 게 느껴져. 

  당신은 11층 베란다에 서서 까마득한 지면을 내려다보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려. 한 발을 내딛는 것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나뉜다는 것이, 그 경계가 당신의 코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이가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갔다는 사실이, 그 경계를 넘게 한 사람이 당신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당신의 심장을 터질 듯이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어. 당신을 둘러치고 있는 고통의 장막 안에서 끝없이 반복해 오던 질문이 당신을 베란다 난간에 한쪽 발을 내놓게 만들었어. 아이에게 자전거를 타고 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가 학원에 가기 싫다고 했을 때 오늘 하루는 쉬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신이 미술학원을 하지 않았다면, 아니, 아이가 학원에 가기 싫다고 했을 때 반에서 중간에 머무르는 성적 때문에 항상 아이를 윽박지르던 남편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다음에 뭐가 되려고 이 모양이냐고 아이를 혼내던 남편의 목소리를 대신해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지금 당신 곁에 살아있을까...... 죄책감에서 비롯된 질문들이 칼날이 되어 가슴에 박힐 걸 알면서도 당신은 질문을 그치지 않았어. 스스로에게 벌을 주기 위해 당신은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또 했어. 

  마지막 한 발 앞에서 당신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어. 창백한 얼굴로 베란다에서 돌아 나온 당신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당당한 존재들이 참여하는 삶의 축제에서 스스로를 추방시켰어. 당신은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고, 다른 사람에게 학원을 헐값에 양도했어. 다니던 요가 학원을 그만뒀고, 식사를 제 때 하지 않았어. 옷을 사지 않았고, 밤에 잠들지 않았어. 하루 종일 집안에 머물면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 공원에 산책조차 나가지 않았어. 대신 조여 오는 고통의 압력을 잊기 위해 좁은 집안에서 빙글빙글 맴을 돌며 책을 읽었어. 아이가 즐겨 보던 만화책들을 대사를 외울 때 까지 읽었어. 남편이 고함을 치며 그 책들을 모조리 내다버린 후에는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서 읽었어. 이창래의 문체가 우아한 소설을, 레이 브래드버리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같은 죽음학자의 책을, 성경과 불경에 대한 책을, 심지어 양자론이나 인공지능에 대한 책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어. 그것들을 읽는다고 해서 당신이 살아가는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어. 그래도 당신은 읽기를 멈추지 않았어. 활자가 만들어낸 세상 속으로 날아오르지 않으면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남편이 당신을 답답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남편은 새롭게 미술학원을 차리고 돈을 벌어 주택 대출금을 갚고, 인석이를 잊기 위해 새로운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현명한 행동이라는 말했지만, 당신은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어. 현실?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기 위해 애를 쓰고, 뭔가를 소유하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게 현실적이고 현명한 건가? 당신은 인석이가 떠나기 전까지는 당신도 그런 ‘현실’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 당연한 ‘현실’ 안에서 작고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쉽게 부서져 현실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지를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려 왔어.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허망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무의미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 때문에 11층 베란다에 서서 난간 밖으로 한 발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렇게 끝을 내더라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인석이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당신에게는 ‘현실’이었어.  

  숨 막히는 우울 속에서 책장을 넘기던 어느 날, 당신은 문득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무력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당신의 소망이 실현되는 이야기, 바로 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당신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꽃이 피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흙과 물과 온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 

  싸늘해진 커피 잔을 쥐고 있는 당신의 손가락이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어. 당신은 키보드를 눌러서 내가 서 있는 창 위에 새로운 창을 열어.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하얀 공간에 이렇게 적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깜빡거리는 커서를 한동안 들여다보던 당신은 여러 번 줄을 바꾼 다음 다른 문장을 적어. ‘일어난 일들은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라고. 당신이 읽은 여러 권의 책 가운데 저런 문장들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책의 행간에 저런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 인석의 친구 승훈이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과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는 수미산 꼭대기와 무간지옥의 거리만큼이나 먼, 접촉 불가의 장대한 허공이 펼쳐져 있어. 당신은 당신이 적어 놓은 두 개의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눈을 감아. 당신은 기댈 데 없는 무한한 허공에 사다리를 걸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내가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를 제대로 끝낼 수 없다는 걸 직감해. 

  어느 새 겨울이야. 두 달 남짓 내가 들어 있는 노트북은 작은 방 책상 위에 올려 진 채 한 번도 열리지 않았어. 가끔 커피 잔을 들고 방에 들어온 당신은 노트북 근처를 서성이며 고뇌가 배인 한숨만 몇 번씩 내쉬다가 방을 나가곤 했어. 오늘도 내가 놓인 책상을 두 손으로 짚은 채 뭔가를 생각하던 당신은 나를 집어 들고 배터리 충전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에코백에 넣고 집을 나섰어. 

  건주 이모의 소식을 듣고 놀란 상태로 나는 여전히 마트 한가운데 서 있어. 나는 내 이야기가 이제 그만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어.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한계가 지어진 단조로운 세계 안에서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되겠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제대로 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없으니까. 

  당신은 내가 든 가방을 조수석에 놓고 차를 몰고 어딘가로 달려 가. 당신이 모는 차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당신의 몸은 단단하게 굳어져가. 도로에 바퀴 자국으로 남아 있던 아이의 피가 지금 당신이 달리는 길 위에 그대로 겹쳐져 눈앞에 떠올라. 당신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핸들을 쥔 손이 위태롭게 떨리기 시작해. 당신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꼭 깨문 채 전장에 나선 장수처럼 몰아닥치는 고통을 노려 봐. 

  당신은 사거리를 지나고 우회전을 해서 얼마쯤 더 달린 다음 자동차를 갓길에 세워. 당신의 차가 멈춘 곳은 중학교 앞이야. 예전에 당신이 살던 마을에 있는, 인석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다니고 있을 것이 분명한 학교. 당신은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을 당겨 가슴에 꼭 끌어안아. 당신의 세찬 심장 박동과 격한 감정이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당신, 잘 해내길 바래. 지금 당신이 하려고 하는 일이 삼년 전 그날에 멈춰 선 당신의 삶을 앞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길 바래. 그래서 당신이 지금보다 더 당신다워지기를, 허망함의 그물에서 벗어나 삶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래. 

  당신은 이제 한쪽 어깨에 에코백을 메고 교문 앞에 서 있어. 찬바람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변해가는 데도 당신은 발 한 번 구르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어. 지금은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간, 오늘이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에 잠시 후에는 아이들이 교문으로 쏟아져 나오리라는 걸 알아. 당신은 굳은 표정으로 승훈이를 기다려. 그 아이를 놓치지 않고 꼭 만나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당신은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아. 막상 승훈이를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미안해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반들반들 눈을 빛내며 철벽처럼 방어막을 치던 그날의 그 표정만 다시 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 표정만 아니라면 승훈이가 고의로 벌인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증오로 치달아 오르는 당신의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해.  

  아이의 부서진 몸을 서둘러 화장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당신은 경찰한테 전화를 받았어. 가해자인 버스 운전자와 합의를 하기 전에 경찰서에 와서 사고 경위서를 확인하라는 전화였어. 매가리 없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담당 경찰 앞에 앉은 당신은 서류에서 인석이의 학교 친구인 승훈과 세연의 이름을 보게 돼. 자전거를 타고 학원으로 가던 인석이는 역시 자전거를 타고 같은 학원으로 가고 있던 승훈이와 세연이를 만났어. 세연이는 인석이처럼 조심성 있고 얌전한 아이였지만 승훈이는 그렇지 않았어. 좋게 말하면 리더십 있고 활동적인 성격이었지만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경쟁을 좋아해서 친구들 사이에 시비를 붙이기도 하는 그런 아이였지. 그런 승훈이가 두 아이에게 누가 더 빨리 학원에 도착하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어. 꼴찌한 사람이 학원 끝나고 오뎅을 사는 걸로 하자고. 승훈이는 말을 뱉자마자 세차게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고, 인석이와 세연이가 뒤를 좇아갔어. 건널목에 먼저 도착한 승훈이는 주황색으로 바뀐 신호를 빠르게 통과했고, 뒤늦게 도착한 두 아이 가운데 인석이만 건널목 앞에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페달을 밟았지. 세연은 건널목에 멈춰선 채, 때마침 초록불로 바뀐 신호를 보고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달려오던 시외버스가 인석이가 탄 자전거를 받아 멀리 날려버리는 걸 고스란히 목격했어. 

  경찰서에서 나온 당신이 어떻게 승훈이의 집까지 갔는지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신은 승훈이의 집 현관문 앞에 서서 쉬지 않고 벨을 누르고 있었어. 놀란 얼굴로 현관문을 연 승훈 엄마에게 다짜고짜 승훈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쭈뼛거리면서 나타난 승훈이의 어깨를 잡아 챈 당신은 충혈된 눈을 사납게 부릅떴어. 도대체 왜 그랬니? 왜 그런 내기를 한 거니? 왜 너 혼자 앞질러 달려간 거니? 내 아들 없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니? 마음속의 절규는 한 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어. 승훈이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러느냐는 반항의 기색이 역력했어. 열한 살짜리 아이가 입술을 앙다문 채 반들거리는 눈빛으로 당신을 노려봤어. 옆에서 보고 있던 승훈이의 엄마가 아들처럼 사나운 표정이 되어 당신을 떠밀었어.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승훈에게, 넌 들어가 있어, 소리치고는 아이가 안으로 들어가자 당신의 코앞에서 현관문을 닫아버렸어.       

  정오가 되자 벨이 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닫힌 창문을 통해서 왁자하게 들려 와. 잠시 후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 둘 현관에 나타나 신발을 갈아 신어. 당신은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해.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급기야 한꺼번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당신은 아이들의 얼굴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긋고 지나가는 아픔을 느껴. 승훈이를 만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사고일 뿐 어차피 승훈이한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들이 당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교문 앞에 서 있는 당신을 아이들이 밀려나오면서 툭툭 치고 지나가. 당신은 차가운 담벼락으로 걸음을 옮겨 힘없이 기대 서. 눈을 감고 아이들이 내는 소음을 듣고 있을 때, 당신이 기다리던 바로 그 아이가 당신 앞을 지나쳐. 승훈이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당신이 눈을 뜨고 승훈이를 멈춰 세우기를, 당신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어서 승훈이가 지나가 주기를 동시에 바래. 그런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자력이 그 아이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당신을 보게 만들어. 눈을 감고 차가운 담장에 기대 서 있는 당신을 승훈이는 단번에 알아봐. 방학을 맞아 즐겁기만 하던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려. 승훈이는 몹시 당황하고 놀란 얼굴로 발걸음을 멈추고 당신 쪽으로 몸을 돌려. 승훈이는 당신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볼 때 까지 당황스럽고 착잡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어. 슬며시 떠졌던 당신의 눈이 승훈이를 보고 휘둥그레 커져. 당신도 승훈이 만큼이나 놀라고 당황해. 

  "승훈아!"

  당신은 입술을 달싹여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러. 아이는 어색하고 뻣뻣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당신에게 인사를 해. 당신은 네 걸음을 걸어 승훈에게 다가가. 

  "그냥 지나다가 우연히......"

  사춘기를 맞은 승훈이가 당신보다 키가 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신의 목이 왈칵 메어져.

  "많이 컸구나......"

  당신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과 인석에 대한 그리움을 엿 본 승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그만 목이 메고 말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승훈은 쥐어짜는 목소리로 대답을 해. 

  "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당신은 만감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승훈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승훈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숙여.

  "건강하게... 잘 지내라."

  당신은 겨우 이 말만을 건넨 후 몸을 돌려 갓길에 세워 둔 차를 향해 걸어 가. 학교 앞을 벗어나 한적한 이면도로에 차를 세운 당신은 운전대에 얼굴을 얹고 한참을 울다가 집으로 돌아와. 

  당신은 작은 방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펼치고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 앞에 앉아 있어. 키보드 위에 놓인 당신의 손가락이 드디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해. 

나는 충격에 빠진 상태로 마트 한복판에 서 있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 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거실을 서성이던 나는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겠다 싶어 운동화를 신고 공원으로 나가. 산책로 끝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아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다가, 갑자기 얼마 전 그곳에서 만났던 중년 부부와 걸음마 연습을 하던 아기의 얼굴을 기억해 내.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충격이 몰려 와. 짙은 눈썹에 하얀 피부를 지녔던 아기의 얼굴이 누굴 닮았는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돼. 그 아기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건주 이모의 아들 성욱이를 그대로 빼닮았던 거야. 그냥 닮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아이가 다시 태어났다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똑같은 얼굴이었던 거야. 죽은 성욱이가 환생을 하다니! 내가 이 신비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라니! 성욱이의 엄마가 죽은 아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다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두 달 전 여기에서 내가 아니라 바로 성욱의 엄마가 그 아이를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아쉬움과 슬픔에 빠져 추위조차 느끼지 못해. 그리고 앞으로 나의 삶이 몹시 고독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내가 보고 느끼고 알게 된 이 사건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간직해야 할 테니까, 누구에게 이야기한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당신, 바로 당신만 제외하고.   

  당신은 키보드에서 두 손을 내리고 내가 들어 있는 화면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어. 당신이 쓰려고 했던 짧은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어. 나 말고는 아무도 당신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실을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인석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허망한 현실에서 되살리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거야. 

  당신, 이제 좀 쉬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환생에 대한 염원은 영원히 내가 간직할 테니, 당신은 공원으로 산책이라도 나가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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