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훈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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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병수作

흰빛이 마치 가시처럼 솟아오른다. 스으으윽. 사아아악. 염전의 피부를 벗겨내는 대파질 소리. 샤샤샤샤. 맹렬히 물기를 뱉어내는 소금 입자들. 순수 결정을 향해. 어떤 불순물도 없는 영점을 향해. 샥샥. 눈을 육박하는 매서운 반사광. 스으윽. 사악악. 나무 대파에 점점 부하가 걸리는 느낌. 팔 주위로 부풀어 오르는 근육. 아랑곳없이 쇄도하는 햇빛 입자들. 온 하늘과 바다를 거쳐 온 거친 빛의 무리. 그렇다. 염부의 진정한 싸움 상대는 소금이 아니라 빛이다. 스윽. 사악. 근육의 한계로 치닫는 대파질. 이제 염전 바닥도 그 속살이 보이는 시점. 염전 가장자리에 모인 소금들. 슥삭. 마침내 멈춘 대파. 그 위로 떨어지는 무색 땀방울. 대파질로 쓸어 모은 소금 결정체들이 오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노인이 소금 알갱이 중 하나를 손가락에 묻혀 비벼 본다. 희미한 물기가 사라지더니 이내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질감. 혀로 맛을 본다. 짜면서 알싸한 느낌. 어딘지 날선 가시들이 서려 있는 느낌. 따갑다. 그러나 좋다. 이것이 바로 소금이 살아 있는 증거. 노인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한쪽에는 늦여름의 바다가, 반대쪽에는 염전들이 있다. 수십 개의 교실 크기 염전 사이사이를 흙빛 둑이 바둑판처럼 가로지른다. 염전 곳곳에서 소금이 햇살에 익는 소리가 들린다. 어찌 보면 염전 대부분의 일은 햇빛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었다. 염부는 그 빛이 뱉어낸 소금을 단지 거두어들일 뿐. 언제부터인가 소금이 빛 자체의 결정체라고 믿었던 노인. 염전으로 들어간 빛이 굳어져 생긴 것이 소금인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와 굳어진 빛. 그렇다. 노인의 상상 속에서 소금은 그런 존재.

어제 막 끝난 노인의 아내 장례식. 애도를 할 여유도 없다. 삼일 동안 미룬 탓에 작업량이 한가득. 삼일장에서 화장까지 일사천리. 기억나는 건 아내가 입은 수의뿐. 그것도 오직 그 흰색만. 선연하다 못해 강렬하기까지 했던 흰색. 수의는 노인이 천을 직접 고르고 주문한 것. 상조업체에서 가져온 누리끼리한 색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 그에게는 색이 중요했다. 흰색을 제외한 모든 색은 그저 불순한 것으로만 보였다. 탁하게 덧칠된 느낌. 혐오하는 색 목록의 정점에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있었다. 군산에 살던 시절. ‘아메리칸’ 자가 붙은 동네에 살던 시절. 양공주였던 어머니 밑에서 늘 보고 자란 색. 붉은 네온사인. 캄캄한 주점 내부. 짙은 양주병. 시간을 역한 담배 연기와 욕지거리 속에서 비틀어지게 했던 색들. 흰빛 결정들 속에서 사십 년이나 일해 왔지만 완전히는 사라지지 않은 기억. 그 검붉은 밤들의 기억. 죽기 전 한 달 간 위태로웠던 아내가 있던 곳은 병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여수 근처의 한 병원. 하얀 벽에 둘러싸여 창밖 하얀 하늘만 바라보던 아내. 항암제와 진통제에 범벅이 되어 풍기던 비릿한 냄새. 아들 둘과 딸이 매일같이 찾아왔지만 아내는 무표정. 막내아들이 소금 입자로 만든 모래시계를 갖다 줘도 무반응. 마치 영혼도 하얗게 변한 듯. 아무런 눈짓조차 하지 않던 아내. 말이 없긴 노인도 마찬가지. 하긴 수십 년 동안 침묵 속에서 살아온 아내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했겠나. 유일한 의사소통 기관은 오직 눈. 그러나 아내의 눈은 눈인사조차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얀빛을 마시고 또 마시기에도 바빴기에.

염전을 보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런데 어딘지 느낌이 이상하다. 불안한 노인. 불길한 예감에 일기예보를 보니 태풍이 온다는 예고. 평소 아내의 날씨 감각에 의존한 습관 탓에 진작 챙기지 못한 날씨. 급히 막내를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 비가 오면 염전의 소금물은 바닷물보다도 염도가 낮아진다.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소금을 걷어서 창고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아직 소금을 걷을 수 없는 소금물은 해주라 불리는 지붕 밑으로 넣어야 한다. 노인은 해주의 문을 열고 급히 염전의 물을 이동시킨다. 꾸룩꾸룩. 소금물이 마지못해 해주 밑으로 들어가는 소리. 소금물이 어느 정도 해주 밑으로 들어갔다. 이제 대파질로 모은 소금을 창고로 운반해야 할 차례. 노인은 막내에게 수레를 가져 오게 한다. 잠시 후. 수레에 한 삽 가득 소금을 퍼 담는다. 수레를 잡은 막내아들의 떨리는 팔. 근력도 요령도 모두 부족한 녀석. 옮길 양이 많아 수레 한가득 실린 소금. 물기까지 머금은 소금의 무게는 큰 돌덩이에 육박했다. 이제 이동할 순간. 녀석이 버틸 수 있을까. 창고까지 레일 길이는 대략 이백 미터. 곡선과 완만한 경사까지 있는 난코스. 흔들거리는 이륜 수레. 좌우로 비틀거리는 막내의 뒷모습. 아차 하는 순간 소금이 쏟아질 터였다. 막내 녀석이 결국 사고를 쳤다. 귀한 소금 수십 킬로그램이 바닥에 쏟아진 것.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노인 나이 일흔다섯. 돈 때문에 아직도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편치 않은 기분. 소금에 서려 있는 귀한 어떤 것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순결하고 정제된 어떤 것,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흘렸다는 생각이 든다. 사고를 내고 쭈뼛쭈뼛 머리만 긁는 막내. 고민할 게 뭔가. 일단 더럽혀진 소금은 그것으로 끝이다. "뭐다냐! 수레 끌고 다시 와야지!" 허겁지겁 달려오는 막내. 노인은 다시 소금을 푸기 시작한다. 잠시 후. 다시 수레를 끌고 창고로 향하는 막내. 이번에는 무사히 수레를 끌고 간다. 그렇게 소금을 옮기길 한 시간. 노인은 막내와 함께 창고의 소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창고는 어지간한 집 삼 층 높이로 거대한 곳. 소금에 남아 있는 물기를 제거하고 출하 직전까지 보관하는 곳. 온통 소금뿐인 창고에선 공기조차 소금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미세한 소금 입자들이 피부는 물론이고 폐와 온몸 곳곳을 침투하는 느낌. 참을 수 없는 따가움은 피할 수 없는 일. 여느 일을 마다하지 않던 막내도 처음에는 창고만은 꺼려했다. 그때 노인이 알려준 요령은 하나. 땀으로 피부 곳곳이 덮일 때까지 삽질을 하는 것. 땀으로 따가운 소금기를 막아내는 것. 둘이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시작한 삽질. 점점 높아지는 소금 산의 경사. 두 사람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이 소금기를 머금은 채 끈적거렸다. 막내가 눈가의 땀을 닦다가 눈이 따갑다며 괴로워한다. 그때 노인이 살짝 피식거린다. 막내의 어설픈 모양새가 답답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소금 산이 천장에 닿을 때쯤 멈춘 삽질. 창고를 나와 신중히 문을 잠그는 노인. 동물이나 곤충의 습격을 걱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금의 적은 오직 둘. 물기. 그리고 사람. 그렇다. 가끔 소금 도둑이 들기도 했다. 노인의 매서운 성정을 모르는 외지인의 소행인 경우가 대부분. 도둑을 노인이 직접 잡은 적은 두 번. 한 번은 도둑의 얼굴을 질식 직전까지 소금에 파묻었다. 또 한 번은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상처에 소금을 마구 쑤셔댔다. 나중에 출동한 경찰도 말릴 정도로.

창고의 소금을 대충 정리하니 어느새 저녁. 겨우 한숨을 돌리는 노인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문해 보았다. 자신이 언제까지 염전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길어야 오 년. 짧으면 내일이라도 쓰러질지 모를 일. 물론 대를 잇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인은 그저 소금과 빛에 취해 살아온 것일 뿐. 다만 막내가 이 일을 기왕 한다면 제대로 하길 바랄 뿐이었다. 햇볕에 굴하지 않고 하얀 결정을 제대로 벼려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노인은 문득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있을 때는 날씨를 미리 대비해 이런 일이 드물었다. 설령 갑자기 비가 오더라도 아내는 척척 일을 거들곤 했다. 노인이 해주로 달려가면 아내가 대파질을 하고, 노인이 수레에 소금을 담으면 아내는 창고로 이동시켰다. 아내는 그렇게 바쁜 염전 일을 돕던 와중에도 식사 준비를 정확한 시간에 하곤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염전과 집을 분주히 오가는 아내의 모습을 노인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 자신은 그래도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얼마간은 쉴 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아내는 설거지나 집안일을 했었다. 노인은 아내가 약간의 쉴 틈도 없는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들곤 했다. 그래서 하루는 노인이 직접 밥을 차린 적이 있었다. 총각 때 요리 실력을 발휘해 나름 한 상 차린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아내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노인이 칼질을 하고, 나물을 볶고, 국을 끓이는 내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노인은 마치 아내의 일을 빼앗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다른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 좀 쉬면서 같이 텔레비전이라도 보자며 억지로 자리에 앉게 한 적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킥킥거리는 무슨 쇼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꼿꼿하게 등을 세운 자세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화면을 응시했다. 마치 조금만 흐트러져도 뭔가 중요한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그때 노인은 확실히 보았다. 마치 소금기 속에 삶을 가두는 것처럼 스스로를 조이길 자처한 아내의 모습을.

노인과 막내가 저녁을 먹자마자 소금 도매업자들이 찾아왔다. 태풍 때문에 물량이 달릴 것 같다며 미리 매수하기 위해 찾아온 것. 업자들이 출하 가격을 묻는다. 노인이 가격을 제시한다. 업자들이 가격을 낮춰 달라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꿈쩍도 안 하는 노인. 그는 출하 시 가격 협상을 안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는 소금은 그대로 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한 소금에 대해서는 최고의 가격을 매겼다. 노인이 자기 염전을 가진 후 늘 고수한 원칙이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벼려 낸 소금에 대해 합당한 대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고가의 소금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가격 인하를 권해도 막무가내였던 노인. 파는 시기를 놓쳐 눅눅해진 소금을 버리기가 부지기수. 그렇게 흐른 초반 삼 년 동안 막대한 적자가 쌓였다. 그때 마침 불기 시작한 천일염 열풍. 웰빙이다 뭐다 일부러 고품질 소금을 찾기 시작한 사람들. 노인의 소금도 그때부터 팔리기 시작했었다. 노인과 협상을 포기하고 제시된 가격에 동의한 업자들. 마침내 노인이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 도착하자 업자 중 한 명이 습관처럼 담배를 꺼냈다. 그때 들리는 노인의 호통. "어디서 담배여! 소금 있는 거 안 보여 시방!" 노인의 소금 창고에서는 흡연은 물론 머리를 긁는 것조차도 금물. 오직 삽질의 부산물인 땀 흘리기. 그리고 내쉬는 숨. 그것들만이 허락된 유일한 행위. 그렇다. 소금 창고는 노인에게는 신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노인은 정성스레 소금을 출하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양을 재서 깨끗한 포대에 담기. 포대 자루에 자신이 생산자임을 나타내는 도장 찍기. 그리고 반듯하게 트럭에 싣기. 노인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업자들의 주문량이 많았던 탓에 출하가 끝나자 시간은 밤 열 시가 되었다.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고집으로 유명했던 노인. 그러나 그런 노인도 아내 앞에서만큼은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막내를 임신했을 때였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아내 나이 마흔둘. 적지 않은 나이. 임신 칠 개월 째. 몇 가지 검진을 마친 의사가 전하는 좋지 않은 소식. 아이가 기형일 수도 있다는 것. 게다가 아이 출산 과정에서 아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그에게는 아이의 기형 가능성보다 아내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게 더 문제였다. 그는 아내에게 인공 유산을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무조건 애를 낳겠다고 고집했던 아내. 그 역시 뜻을 접지 않고 계속 아내의 고집을 꺾으려고 했다. 마침 때는 봄. 일을 막 시작해야 하는 시기. 그러나 그는 마치 시위라도 하듯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평소 마시지 않던 술까지 마시며 애를 낳으면 죽을 거라고 소리쳤다. 그러던 어느 아침. 아내가 차려준 밥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짰던 국, 반찬. 심지어 밥조차도. 그날 점심도, 저녁도. 음식에 뿌려진 소금을 맛보며 그는 깨달았다. 아내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 것인지를. 그저 염전을 일구며 앞으로의 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음을. 나중에 아내가 무사히 출산을 할 때까지 그는 머릿속을 오직 소금으로만 채웠다. 모든 잡념을 지워버리는 그 지독히도 하얀 소금만을.

업자들에게 소금을 출하하고 집으로 와서 잠을 청하는 노인. 창밖으로는 태풍이 몰고 온 매서운 비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늘 자신의 팔을 꼭 쥐고 잠을 청하던 아내의 손이 없어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벽에 걸린 그림에 눈길이 간다. 창문으로 들어온 밤바다의 희미한 빛이 그림 위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림은 바로 노인의 염전을 그린 것이었다. 막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올해 서른 살인 막내. 노인 나이 마흔 다섯에 얻은 늦둥이. 미대 졸업장 외에는 별반 내세울 것도 없던 녀석. 다른 형제와 달리 제대 후에도 계속 고향집에 머물렀다. 일은 하지 않은 채 매달린 건 그림뿐. 소재는 하나같이 염전.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봐온 소금밭. 줄기차게 흰색만 칠한 탓에 도화지와 거의 구분이 안 되던 그림. 그런 막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노인. 그러다가 일 년 전. 아내가 간암 선고를 받던 날. 돌연 염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던 막내. 그 막내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염전 일을 처음 하던 때가 떠올랐다. 미군 부대와 어머니의 양공주 생활을 지독히도 혐오했던 젊은 시절의 그. 고향의 검붉은 빛을 지울 수 있다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 제대를 한 뒤에는 어머니가 사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에 다른 곳에서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고기잡이배나 타볼까 해서 항구를 찾아갔다. 그러나 마침 때가 아니었다. 겨울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공장에서 일하는 손쉬운 길도 있었다. 그러나 부대 인근의 골목과 주점을 연상시키는 어둠은 질색이었다. 가능하면 야외에서 하얀 것들만 바라보며 일을 하고 싶었다. 하얀 것들 속에 머무르면서 맘속의 검은 구멍을 빛들로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떠돌다가 여수 근처에서 발견한 게 한여름의 염전. 하늘보다 더 하얗고 햇살보다 더 눈부신 소금들의 천국. 과거를 완전히 표백하고도 충분할 정도로 흰빛이 충만한 곳. 그렇게 시작된 염전 일. 처음에는 빈약한 월급에 허름한 숙식만 제공받았다. 염전 특유의 더위 속에서 일은 가혹했다. 따가운 소금기에 피부도 성하질 않았다. 무엇보다 시신경을 태울 것 같은 햇빛은 가장 쉽지 않은 상대. 그러나 그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하얀빛을 숨 쉴 때마다 새살이 돋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직 빛만을 들이마시며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 그는 염전 일의 시작과 동시에 그것이 천직임을 깨달았다.

태풍으로 요란한 바깥 탓에 노인은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득 염부로 일을 시작하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결혼 직후. 어머니를 찾았을 때, 한낮이었는데도 담배연기와 술 냄새가 가득했던 어두운 주점. 몇 년 만에 보는 아들 앞에서도 계속 잔만 들이키던 그의 어머니. 그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고 아내를 소개했다. 그때 아내와 그를 찬찬히 바라보던 어머니가 던진 말. "가그라. 여긴 느그들이 있을 곳이 아닝게." 그는 곧바로 돌아서려고 했지만 아내가 붙잡았다. 가져온 선물을 드려야 하지 않느냐는 몸짓. 그가 선물을 내밀었고 아내가 받아서 전해주었다. 어머니는 선물을 보지도 않은 채 가라는 손짓만 했다. 그때가 그녀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때로부터 일 년 후 전해진 어머니의 사망 소식.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은 함께 일한 종업원 두 명뿐. 시신 화장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 덕분에 그가 염부가 되었다는 것을. 그의 어머니는 감춘 게 아무것도 없었다. 미군 장교와 서로 희롱하는 모습. 흑인 병사와 키스하는 모습. 백인 상병과 누워 있는 모습까지도. 그녀는 종종 미군들과 싸우기도 했다. 물론 맞는 쪽은 항상 그녀였다. 어머니는 피멍이 든 채로 술을 마시며 영어로 이상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본래 곡은 경쾌한데 그녀의 입에서 걸쩍지근하고 눅눅하게 변한 것 같은 그런 노래를.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는 악취가 풍기는 진득진득한 늪에 한없이 빠져드는 느낌이 들곤 했다. 다른 양공주의 자식들이라면 충분히 엇나가게 자랐을 법한 환경.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가 갖게 된 것은 어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녀 자신을 혐오하게 내버려 두었다. 학창시절. 그가 귀가가 늦어지거나 다른 곳에서 잠을 자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늘 퉁명스럽기만 한 것에 대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그 적나라한 증오의 시선에 대해서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그녀와는 다른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었을 뿐. 그는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그녀 곁을 떠나 빛을 찾도록 했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지난밤의 태풍으로 맑아진 하늘에서는 햇빛이 맹렬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태풍 때문에 염전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바람 때문에 흙이 들어가서 온통 뿌옇기만 한 염전. 그러나 예상보다 많이 망가지진 않은 편에 속했다. 수문을 열어 바닷물을 새로 채우는 정도로 해결이 될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인이 염전을 지나 바다 쪽으로 간다. 힘껏 수문을 하나, 둘 연다. 두꺼운 방수 페인트칠을 했어도 녹이 생긴 수문. 내년에는 막내 녀석과 함께 수문을 모조리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노인. 수문이 열리는 소리. 철컥. 끄르륵. 이어서 밀려드는 바닷물. 꾸룩꾸루룩. 샤아아. 수문 주위를 감싸는 하얀 포말. 첫 번째 염전을 채우기 시작하는 해수. 염전 바닥의 비닐 탓에 마치 검은 기름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 그러나 그런 불길한 느낌은 잠시. 물이 더 차오르자 여기저기 수면에서 반사되는 햇살. 보이는 건 오직 흰빛 가시들뿐. 잠시 눈이 부셔 깜박이는 노인. 그는 주변의 권고에도 선글라스는 절대 착용하지 않았다. 바닷물에 반사된 햇살. 소금물의 흰빛. 그것은 노인이 염전 일을 하는 유일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염전에 물이 차자 수문을 닫는 노인. 철컥. 그사이 막내에게 바로 옆 두 번째 염전으로 물이 빠지게 한다. 두 염전의 높이 차는 삼 센티. 그렇게 여섯 번째 염전까지 소금물이 농도별로 층을 이루게 한다. 저농도 소금물이 있는 염전들의 이름은 난치. 이어서 열 번째 느티라 불리는 염전들까지 중간 정도 농도의 소금물로 채운다. 이어서 열두 번째 결정지에 가서야 얻어지는 고농도의 소금물. 중요한 것은 타이밍. 고농도와 저농도의 소금물이 가능한 섞이지 않게 하는 일. 주의 깊게 염전과 염전 사이 배수로의 개방과 폐쇄를 명령하는 노인. 소금 빛만큼이나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빛. 잡념은 금물. 이 순간. 노인의 머릿속엔 아내의 죽음도, 미덥지 않은 막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금물. 배수로. 타이밍. 그 절묘한 조합만이 그를 사로잡을 뿐. 마침내 염전에 새로운 바닷물이 채워졌다. 신선한 피를 막 수혈한 듯 염전 여기저기서 벅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 순간. 노인은 예전에 훨씬 크게 태풍 피해를 입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십 년 전쯤. 노인이 빚을 내서 염전을 확장한 적이 있었다. 수입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큰 아들과 딸이 연이어 결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해에 찾아온 몇 십 년 만의 태풍. 혼탁한 바닷물과 함께 염전을 덮은 해조류. 엉망이 된 둑과 배수로. 못 쓰게 된 해주와 창고 그리고 수문. 태풍의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염전 확장 때문에 제대로 대비가 안 된 탓도 있었다. 자식들 결혼 자금은 고사하고 염전을 수리할 비용도 없는 상황. 노인은 염전을 파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봤다. 돌이킬 수 없이 굳어 가던 염전. 그렇게 삼 일이 지났을 때. 아내가 직접 염전 수리를 시작했었다. 해조들을 걷어내고 바닥 비닐을 수선하고 망가진 해주의 지붕도 떼어 냈다. 그러더니 남편의 손에 삽을 거의 강제로 쥐어 주면서 등까지 떠밀었던 것. 그때 그는 보았다. 아내의 눈에 서린 완강한 기운을. 결국 그는 염전을 팔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었다. 창고와 수문을 교체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아내는 주변 염부들과 함께 도청까지 찾아갔다. 말을 못한 탓에 붉은 매직으로 삐뚤삐뚤 쓴 지원금 호소문을 들고 갔다. 처음에는 공무원들도 고개를 저었다. 수재 지원금 같은 건 생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다른 염부들이 포기를 한 뒤에도 매일같이 도청을 찾아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담당자들을 따라다니며 호소문을 들이대었다. 도청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감히 아내를 도청에서 끌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 때문이었다. 어떤 맹금류보다도 매섭고 시퍼런 눈빛. 급기야 도지사까지 그녀를 보게 된 어느 날. 아내는 수리 비용에 대한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햇볕에 달궈지는 염전. 흙빛 속에서 반짝이는 하얀 소금 입자들.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팽팽해지는 근육을 느꼈다. 이젠 거의 자동적으로 소금 빛만 보면 몸 중심부에서 스위치가 켜지는 느낌. 발에 밟히는 소금의 서걱거림에서 탄력이 느껴진다. 탱탱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소금 입자들. 어느새 태풍의 흔적을 털어 버리고 솟아나는 소금들. 벼려 내야 할 소금이 많다는 생각에 힘이 생긴 노인. 큰 소리로 막내를 불렀다. 오늘부터는 막내에게 염전 일을 더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는 노인. 정리가 덜 된 염전 여기저기에 소금 꽃이 피어 있다. 소금 덩어리가 엉겨 붙어 표면을 덮은 것들. 햇볕을 가리고 증발을 방해시키기에 제거를 해야 하는 것들. 노인이 막내에게 소금 꽃 걷개를 가져오라고 말하려던 찰나. 어떻게 알았는지 걷개를 미리 준비해 온 녀석. 흐뭇해할 틈도 없이 노인은 소금 꽃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차아악. 차아악. 비늘을 벗기듯 표면의 소금 꽃들을 빈틈없이 긁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맑은 수면. 그 위로 반사되는 햇빛. 아침 하늘을 품은 빛에 생기가 돈다. 더 신이 난 노인이 외친다. "어여 걷어라. 대파질도 해야제." 그렇다. 오늘은 제대로 막내에게 대파질을 가르칠 참. 노인이 막내에게 직접 해보라며 대파를 건넨다. 막내가 대파질을 시작한다. 어딘지 불안하고 허술한 느낌. 스윽. 대파질이 염전 가운데에서 멈춘다. 대파 앞에 걸린 소금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 "그럴 땐 말이여, 요로코롬 소금을 중간에서 잘라내는 거여." 시범을 보이는 노인. 소금 더미의 앞부분만 염전 가장자리로 이동시킨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막내. 노인이 대파를 건넨다. 다시 대파질을 시작하는 막내. 스으윽. 줄어든 무게에 대파질이 한결 가볍다. 몇 번 막내를 지켜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려 그렇게 하는 것이여, 라고 생각하는 노인. 처음으로 막내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인은 진지하게 막내에게 염전을 물려줄 일을 생각해 본다. 염전은 막내가 막 태어날 무렵 갖게 된 것이었다.

결혼 직후 노인은 염전을 갖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본래 염전은 가을과 겨울에는 문을 닫는다. 다른 일꾼들은 노가다나 허드렛일이라도 했지만 그는 달랐다. 소금을 만지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당시 그의 원칙. 때문에 봄과 여름에 번 돈은 가을과 겨울이 되면 모조리 생활비로 탕진되었다. 돈이 전혀 모일 수가 없었던 셈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신혼 생활. 당연히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개 염전 일꾼이었던 그가 가졌던 건 단칸방뿐. 분홍빛 인테리어는 고사하고 간단한 살림살이조차 부족했던 형편. 그가 집안에 가져오는 건 염전의 짭짤한 냄새와 흙먼지뿐. 그런데 그런 그를 아내는 항상 깔끔한 기운으로 대했다. 그렇다. 깔끔함. 아내는 출입문은 물론이고 방바닥, 부엌, 화장실 등 집안 곳곳을 늘 청결하게 했다. 여느 새댁들처럼 그냥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것과는 뭔가 달랐다. 아내는 집안에 빛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허름한 집을 빛의 벽으로 감싸는 느낌. 그는 집안이 마치 작은 염전처럼 느껴졌다. 큰 염전과 작은 염전을 오가는 삶. 빛과 빛 사이를 왕래하는 나날. 그사이 점점 흐려진 검붉은 어린 시절. 사라져가는 과거의 얼룩들. 그러다가 그를 변하게 한 사건 하나. 염전 일이 막 끝난 가을 어느 날. 염전 주인은 그와 아내에게 창고와 염전 정리를 맡겼다. 그런데 그가 염전에서 일하는 사이 염전 주인이 창고에 있던 아내를 건드리려고 했다. 마침 염전의 나무 대파를 정리해 창고로 가지고 가던 그가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성을 잃고 주인을 팼다. 피투성이가 된 주인. 순식간에 박살이 난 나무 대파 세 개. 그가 아예 이륜 수레를 들어 올려 주인의 머리에 찍어 던지려던 찰나. 오랜 기간 침묵 속에 지내 온 아내가 낯선 목소리로 ‘으어으어’ 울면서 그를 말렸다. 그때 그는 처음 아내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생소하고, 처절하고, 간절한 소리를. 솟구치던 분노조차 사라지게 하던 그 기이한 음성을. 그날 이후. 그는 아내와 다른 염전으로 떠났다. 그리고 염전 개장 전까지 노가다든 뭐든 닥치듯이 일했다. 그러면서 결심했다. 돈을 모으기로. 돈을 모아서 자기 염전을 갖기로. 그 염전을 아내가 마음 놓고 거닐게 하기로. 그러기를 십오 년. 아내가 막 늦둥이를 임신하기 직전. 마침내 그는 자기 염전을 갖게 되었다.

막내의 대파질을 한창 보고 있는데 이웃 염전의 김 씨가 노인을 찾아왔다. 언제 염전을 폐장할 거냐며 물어보기 위한 것. 염전 폐장을 동시에 하는 건 염부들 사이의 오랜 묵계였다. 노인이 김 씨에게 외쳤다. "뭔 폐장이여. 아직 해가 짱짱한디." 그러자 김 씨가 고개를 저으며 일기 예보를 전해주었다. 다음 주부터 장마가 온다는 소식, 장마가 지나가면 기온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노인이 김 씨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폐장 때문에 수입이 없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소금은 없고 칙칙한 검은 비닐만 깔린 염전을 보는 게 싫었다. 가을과 겨울만 되면 노인은 늘 우울한 기분에 시달렸다. 이제 아내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걱정이 밀려왔다. 김 씨가 계속 대답을 채근한다. 짜증인 난 노인이 버럭 화를 낸다. "몰러! 아직 짱짱하단 말여!"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김 씨. 노인의 성미를 아는 그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하고 돌아간다. 노인이 김 씨의 등 뒤에서 욕을 한다.

그토록 겨울을 싫어한 노인. 그런데 중요한 기억 하나가 그의 겨울 속에 있었다. 염전에서 일을 시작하고 맞이한 첫 겨울. 염전이 폐장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버텼다. 하루 종일 해변만을 거닐면서. 파도의 하얀 포말에서 위로를 구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정오 무렵. 그가 겨울 바다의 풍광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던 순간. 문득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른 바위에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엇에 굶주린 듯 간절히 파도와 하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조약돌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바다로 던졌다. 조그맣게 이는 하얀 거품. 그러자 그녀도 돌을 하나 던졌다. 바닷물까지 이르지는 못한 곳에 떨어진 돌. 그때 그가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단단하면서 맑은 눈을 지닌 또래 여자였다. 그때까지 그는 여자라면 말 한 번 건네지 못했었다. 남녀관계라고 하면 양공주와 미군 병사만 떠올렸다. 그런데 왠지 달랐던 그날. 마치 소금밭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그녀에게서 풍겼다. 하얗고 또 하얗다는 느낌.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근처에 사느냐고 말을 걸었다. 그의 입술만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던 그녀. 그는 왠지 머쓱하고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 그녀가 다시 던진 돌. 이번에는 아예 그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여자가 장난을 치는 걸까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은 그. "지는 쩌그 김 씨네 소금밭서 일하는디 … " 난데없는 염전 이야기에 소리 없이 웃는 그녀. 하지만 그는 소금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겨우 몇 개월 일해 본 처지인데도 소금과 염전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그렇게 몇 분을 이야기했는데도 말이 없던 여자. 그래도 또렷하게 그를 향하고 있던 눈빛. 그 시선에 힘이 생긴 그는 이야기에 더 열을 올렸다. 태어나서 그리 많은 말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루어진 아내와의 첫 만남.

그들은 그 후 해변과 염전 근처에서 종종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전히 말이 없던 그녀. 그는 그런 그녀를 본래부터 벙어리였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도 입술을 잘 읽는 벙어리 특유의 기술로만 여겼다. 그러다가 그들이 만난 지 한 달이 되던 어느 날. 그는 염전 동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쉬쉬하는 사건이 있었던 그날 … 여수와 순천 일대가 핏빛으로 가득했던 그날 … 그녀는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입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줘서 굶진 않게 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오직 일만 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빨래를 하고, 변소와 마당을 청소하고, 땔감을 날랐다. 낙엽이 쌓이면 낙엽을 쓸고, 눈이 오면 눈을 쓸었다. 마을은 어느새 그녀 덕분에 윤기가 흐를 정도가 되었다. 모두가 그녀의 내력에 대해서 알았지만 섣불리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간 그녀 안의 둑 같은 것이 무너져 한바탕 피라도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날의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한 정황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묻지 않았다. 다만 자신만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일을 하지 않을 때면 바다만 바라보는 이유를. 무엇을 지우기 위해 그토록 하얀 파도 포말에 집착했는지를. 그리고 결심했다. 그녀를 품어야겠다고. 염전의 하얀빛 속에 함께 머물겠다고. 그들이 결혼한 것은 그해 겨울이 막 끝나고 봄이 왔을 때였다.

막내의 대파질이 마무리 되어 갔다. 늦여름의 기세를 담고 한없이 염전으로 쇄도하는 햇빛. 섭씨 사십 도에 육박하는 온도. 여기저기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는 염전. 소금이 올라오는 모습. 소금 입자들이 가시를 내미는 모습. 쉬이익. 치이익. 소금이 숨을 뱉어내며 올라오는 소리가 염전 전체에서 들려온다. 노인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 속 깊숙한 곳까지 소금기로 채울 기세였다. 온몸 곳곳에 하얗게 빛이 들어차는 느낌.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느낌. 그 순간. 노인은 결심했다. 겨울까지 염전을 개장하겠다고. 한겨울 눈에 소금이 묻힐 때까지 염전을 일궈보겠다고. 이웃 염전과 동시에 폐장해야 한다는 묵계 따위는 깨버리겠다고. 아내가 죽은 해이니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막내가 대파질을 마쳤다. 염전 구석에 소금이 꽤 쌓여 있었다. 이번에는 노인이 수레에 소금을 담을 차례. 그가 삽질을 시작한다. 척. 착. 소금으로 차오르는 수레. 계속되는 삽질.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과 젖은 상의. 노인이 잠시 숨을 돌린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본다. 그러자 소금이 모인 곳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척. 착. 다시 시작되는 삽질. 소금이 삽을 따라 수레로 흘러내린다. 스르륵. 수레에 가득한 소금 알갱이들. 그 위로 무수하게 돋아나는 흰빛 가시들. 소금에 반사된 햇볕에 노인의 눈이 따갑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는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아내의 하얀 눈빛.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하얗다. 보이는 것은 오직 흰빛 하늘. 그리고 염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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