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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이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러나 조금 전 각주를 바꿔달았으므로 불과 몇 분 전의 일이기도 하다.

내가 위암이라네,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내 귓전에 떨어졌을 때 나는 학교 도서관 3층과 4층 사이의 계단에 앉아있었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실내 계단이었는데 그 단단해 보이던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현실인지 꿈인지 알아보려고 자꾸만 허공을 두드렸다.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반쯤 일어나다 주저앉기를 여러 번, 그 후로 어떻게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삶을 급변시키는 순간은 길거나 특별하지 않다. 늦은 점심을 먹는 순간일 수도 있고 양치를 하며 거울을 보는 한순간일 수도 있다. 도무지 변화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순간에 누군가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중졸이었다. 그 학력이 아이들이나 그의 부인에게는 크나큰 콤플랙스로 작용했을지 모르나 내가 아는 한 그는 한 번도 당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누구보다 지혜로웠으며 수준 높게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 줄줄도 알았다.

어떤 예술 작품에 있어서 각주를 다는 일은 금기사항이고 사족이라는 의견도 있다. 각주 없이도 대상을 이해하고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각주 없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더러 있다. 독자에게 알아 맞춰보라는 방식보다는 힌트 주는 방식을 나는 선호한다. 그러니까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가르쳐주는 정도로 말이다. 방향 정도는 가르쳐 주어야 작가가 보는 곳을 향해 독자도 몸을 돌릴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 설명 없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예술 작품보다 더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의 속내다. 수많은 표정으로 가려진 사람의 속내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입견으로 섣부른 실수를 하기도 하고 편견 때문에 갈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희한한 일은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구요, 라는 각주를 다는 순간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가급적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누구든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 각주다.

가령 이것은 그에 대한 각주다. ‘그는 이른 봄, 산에 오르면 꽃이 피지도 않은 진달래 가지 하나를 꺾어오곤 했다. 플라스틱병에다 그 가지를 꽂아 아랫목에 두었다. 며칠이 그렇게 흐르면 어느새 그 가지에서 꽃눈이 맺히고 다시 며칠이 지나면 꽃이 벙그는 것이었다. 해마다 그의 안방에서 첫 진달래를 보곤 했다. 더욱이 그는 그 첫 꽃을 아내에게 내밀며 선물이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각주 달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각주 달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그 사람을 추억하는 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간혹 내 추억이 그것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무제보다는 오독이라 하더라도 각주가 낫다. 여기에는 덤으로 붙어오는 또 하나의 효과도 있다. 누군가에게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랍니다”하고 말하는 순간 똑같은 각주가 스스로에게도 달린다는 것이다.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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