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충신으로 활약한 일본 장수 '사야가'의 역사 고스란히

녹동서원 전경
대구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산간 마을에는 3D 영상관 등 현대 문물과 어우러진 ‘녹동(鹿洞)서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녹동서원 현판
현재 서원뿐만 아니라 김 장군이 귀화한 역사적 배경과 그가 남긴 사상 등을 알리는 달성한일우호관을 통해 한국과 일본 교류의 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충선 장군 누구인가

김 장군은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시조지만, 본래 일본인으로 이름은 사야가(沙也可)다.

그는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 당시 22세 나이로 조선 침공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예의문물이 반듯한 조선의 모습을 본 김 장군은 침략에 대한 명분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같은 해 4월 20일 자신이 이끌던 500명의 군사와 함께 조선에 귀화했고 당시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하는 것은 명분이 없고 가까운 이웃 나라에 화만 끼칠 뿐이다. 나는 죽을 수는 있지만,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김 장군은 조선 장수로서 크게 활약했다. 남해지역 각 전장에서 여러 공을 세우고 1953년 울산군수 김태노(金太虛)와 서인충(徐仁忠) 군사와 합세해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사성 김해 김씨,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자헌대부(정2품) 벼슬까지 받았다.
김충선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으로 모하당 선생을 기리어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다음 해에는 조선 병기의 미약함을 상소하고 조총과 화약제조법을 가르쳤다. 훈련을 강화해 정예군을 길러 일본군과 맞서 전세를 호전시킨 것도 공을 크게 인정받았다. 이후 국경 침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직접 변방 전장으로 나섰고 10여 년 동안 공적을 쌓았다.

김 장군이 우록리로 돌아온 것은 1628년이다. 우록리에 살며 가정에 대한 훈계로 자손을 기르고 주민들과 상부상조를 이루며 살았다.

1642년 김 장군은 72세 나이에 별세했으며 남긴 저서로는 ‘모하당집(慕夏堂集)’이 있다.



△한일 교류 흐름 ‘일본 매국노가 일본의 양심으로’

녹동서원이 한일 교류의 장으로 이어진 과정은 일본 여론의 변화다. 앞서 일본에서는 김 장군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 꾸민 자작극’이라고 비판했다. 실존 인물인지 의심하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1970년대 일본에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직접 우록리를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면서 김 장군은 실존 인물로서 일본 여론과 학계에 주목을 받게 됐다.

이어 1992년 일본 NHK 방송에서는 ‘출병에 대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고 일본 언론에서도 ‘일본의 양심’ 등 호의적인 시선이 생기면서 한일 교류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본격적인 교류는 달성한일우호관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지난 2012년 5월 3일 달성한일우호관이 개관할 당시 일본 와카야마현 축하단이 참석해 한일 교류의 물꼬를 텄다. 같은 해 6월에는 니카이 토시히로 중의원, 오오시타 에이지 작가 등 일본인 300명이 달성한일우호관을 방문해 개관을 축하했다.

이후 일본 역사학자 등 연구가와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으며 지난달 26일에도 20여 명의 한일전통무예인교류회 소속 일본인들이 녹동서원을 찾아 김 장군의 지난 역사를 돌아봤다.



△녹동서원의 역사와 현재

대구 지역 유림은 김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서원 건립 상소를 올렸고 1794년 녹동서원을 준공해 위폐를 봉안하게 됐다.

하지만 현재 위치에 있는 녹동서원 건축물 자체 역사는 짧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됐다가 1914년 다시 복원된 녹동서원은 후손이 늘어난 것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결국 1972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100m 떨어진 현재의 장소로 이축과 동시에 증축됐다.
녹동서원(숭의당)
서원 전체를 보면 서쪽에서부터 충절관, 향양문과 녹동서원(숭의당), 녹동사, 달성한일우호관이 차례로 서 있고 서원 뒤편에는 김충선 장군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충절관은 1997년 8월에 착공해 이듬해 3월 14일 준공된 곳으로 김 장군의 사상을 기리는 한일 문화 교류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건물 내벽의 절반 이상은 김 장군이 쓴 문집 내용으로 이뤄진 병풍이 세워져 있다.

1892년 김충선 장군이 고종임금으로부터 받은 교지와 임진왜란 때 사용됐던 조총을 비롯해 한일 양국의 역사·문화, 임진왜란 관계 전문도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김충선 장군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지은 ‘향양문’. 남쪽 고향을 바라보고 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향양문은 김 장군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으로 남쪽을 향해 건립됐다. 앞서 김 장군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남풍유감시취(南風有感時吹) 개호입방내(開戶入房內) 조연유성거(條然有聲去) 소식무인래(消息無人來)’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남풍이 불 때 고향이 생각나고 조상의 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지를 걱정한다. 또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계속 들지만, 나라에 불충하고 가문에 불행을 끼친 가장 못난 죄인이라며 보기 드문 자신의 운명을 토로하는 뜻이 담겨있다.

김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은 숭의당은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으로 구분됐으나 사당이 강당의 우측 배면에 자리 잡아 병렬형 축을 이룬다. 배치는 외삼문인 향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학당인 숭의당이 보인다. 중앙에 있는 대청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다.

1794년에 최초 건립된 녹동사는 이후 녹동서원과 같이 이축·증축됐다. 김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으로 모하당 선생의 충(忠)과 의(義)의 뜻을 기리어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배향하고 음력 10월 첫 번째 일요일에 이곳에서 묘제를 지낸다.
김해 김씨 문중을 대표하는 김상보 회장이 달성한일우호관에서 김충선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달성한일우호관은 역사관, 3D 영상관, 예절교실, 기획전시관, 일본식 정원 등으로 구성됐다. 김 장군이 귀화한 배경과 이후 활약상, 한일 교류를 위한 자료 등을 보유하고 있어 학생들의 교육 현장으로도 활용된다.

이곳에는 김 장군의 저서 모하당 목판이 있고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에서 녹동서원에 기증한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던 총도 전시돼 있다.

녹동서원은 현재 사성 김해 김씨 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직접 유지·관리하고 있다.

또한 일본을 오가며 직접 현장에서 김 장군의 역사를 알리고 민간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중을 대표하는 김상보 회장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시조에 대한 근거를 많이 찾았는데, 이는 시조의 위대함을 알리는 것보다 역사를 올바르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며 “우리 민간에서부터 한국과 일본의 교류를 활발하게 이어나가면 언젠가 정치적, 외교적인 교류로 뻗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재용 기자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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