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했던 한국전쟁이 할퀴고간 길 따라 '평화의 새살' 싹트다
모든 경계에는 긴장이 흐른다. 이해관계가 맞부딪치는 까닭이다. 이해충돌이 가장 첨예한 경계 중 하나가 성(城)이 아닐까 싶다. 험준한 산성에서의 전투는 처절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나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에는 1200여 곳의 산성터가 있다고 한다. 산성에 얽힌 역사적 상흔이 숱한 것은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았던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가산산성은 현대사의 상처가 얼룩진 곳이다. 조선 인조, 숙종, 영조 때 각각 내성 외성 중성이 차례로 축성됐고 성곽의 총 길이는 7km가 넘는다. 산성이 축조된 후 큰 외세의 침입은 없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가산산성 부근에 엄청난 양의 폭탄이 떨어질 정도로 처절한 혈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과거에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세월은 그렇게 가산산성에서 조금씩 끔찍한 전쟁의 상흔을 지우고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가산산성과 가산바위까지 이르는 숲길을 따라 오붓하게 걸을 수 있는 걷기 명소가 됐다.
절 오른쪽으로 비켜 오르자 탐방지원센터가 나타난다. 길가에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기념지역’ 작은 안내판이 있다. 2000년에 시작된 유해발굴은 11년 동안 진행됐고 국군 전사자 26구를 찾아냈다고 한다. 가운데에 부직포가 깔려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동문과 치키봉 방향 이정표를 만난다. 치키봉 방향은 에둘러 가는 완만한 길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동문에서 만난다.
곧바로 올라가면 박석이 깔린 숲길로 약간 경사도가 있는 길로 동문까지 3.2㎞다. 조금 힘이 들어도 숲길을 걷는다. 숲길을 20여 분 정도 오르면 임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힘겨운 오르막은 여기서 끝나고 울창한 활엽수림 사이로 난 완만하고 넓은 길이 가산 산자락을 지그재그로 휘감고 오른다. 산행이라기 보다는 쉬엄쉬엄 걷는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어울린다. 임도 주변에는 큰 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빙하기 흔적이 남아있는 크고 둥글며 일정한 장축방향성을 가졌다. 모가 나거나 작은 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너덜과는 모양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빗자루로 돌을 쓸어 올려 가산산성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이 돌이 바로 돌강의 화강암이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축성됐는데, 길이 460m에 중문과 문루 1개가 만들어졌다. 중성은 비축미를 보관하는 데 사용했으며, 중요 시설은 대부분 내성 안에 있었다. 이처럼 가산산성은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내성이 완공되던 해 이곳에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설치하고 군위·의흥·신녕·하양 네 현을 관장케 했다. 관리에 불편한 점이 많아 순조 19년(1819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추사 김정희 아버지 김노경의 건의로 도호부가 팔거현(칠곡읍)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