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왜 모두 왕자 아니면 공주냐, 현실을 맞닥뜨려야 할 아이들에게 ‘신데렐라’보다는 ‘몽실언니’를, ‘유리구두’보다는 ‘검정고무신’을 더 자주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이 한동안 득세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여야 한다는 단선적인 도그마도 그 무렵에 생겼지 싶습니다. 사실, 그런 문제의식은 우리 어른들의 것이지 아이들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순진한 어른’들이지 ‘현실 속의 아이’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커 봐서 아는 일이지만 아이들은 생각만큼 유치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늘 조숙합니다. 아이들은 순진하게도 이미 현실의 강력한 지배를 여과 없이 받고 있기 때문에 이중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착한 어른’들과는 달리 최대한 영악하고 이기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몽실언니’와 ‘신데렐라’를 그리고, ‘검정고무신’과 ‘유리구두’를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언제 신데렐라와 유리구두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읽고 들어도 그들 자신이 왕자와 공주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걸 모르고 무모하게 현실을 무시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알면서 짐짓 흉내만 한 번씩 낼 뿐이지요. 아이들의 달콤한 꿈 꾸기를 옆에서 돕는 동화를 두고 감 놓아라 배 놓아라 공연히 트집 잡는 어른들을 볼 때면 그들이야말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잘 모르는 ‘다 큰 아이들’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환상에서 출발해 현실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품속에서는 내가 마음먹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생각대로 이루어지리라’라는 전능감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직접 세상에 두 발을 딛고 내려섰을 때 자기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현실적 인간으로 재탄생합니다. 현실적 좌절이 반복되는 가운데 점점 더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런 좌절 속에서 복종도 하고 타협도 하고 극복도 하면서 자라납니다. 그렇게 ‘순탄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유아적 전능감을 해소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못해 자신과 주변에 불편과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잦습니다. 뉴스로 전해지는 끔찍한 일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부터 환상과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절실히 느낍니다.

아이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6세 전후, 늦어도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라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좀 더 일찍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조숙하다는 평을 듣던 저는 서너 살 무렵부터 현실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환상이 없었습니다. 밖에서도 환상을 접할 기회가 잘 없었습니다. 집에 책이 없어서 초등학교 시절은 달콤한 ‘꿈 이야기’를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통해 ‘환상’을 만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저는 전능감은커녕 최소한의 자존심도 버린 채 철저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멀쩡한 제 답(거북선은 군함이다)을 틀리게 매기고, 부유한 부모를 지닌 경쟁자의 답(거북선은 잠수함이다)을 맞게 매긴 선생님에게도 제대로 항의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그저 선생님의 무지를 원망했을 뿐입니다). 그런 게 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인생 초기의 유아적 전능감을 제때에 버리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까지 트러블 메이커로 사는 이들을 보면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인물들 중에서 특히 ‘몽실언니’나 ‘검정고무신’ 숭배자가 많이 발견되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면서 제 자신은 끝까지 ‘왕자와 공주’로 살려고 하는 것 같아서 답답할 뿐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