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환상에서 출발해 현실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품속에서는 내가 마음먹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생각대로 이루어지리라’라는 전능감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직접 세상에 두 발을 딛고 내려섰을 때 자기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현실적 인간으로 재탄생합니다. 현실적 좌절이 반복되는 가운데 점점 더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런 좌절 속에서 복종도 하고 타협도 하고 극복도 하면서 자라납니다. 그렇게 ‘순탄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유아적 전능감을 해소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못해 자신과 주변에 불편과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잦습니다. 뉴스로 전해지는 끔찍한 일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부터 환상과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절실히 느낍니다.
아이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6세 전후, 늦어도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라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좀 더 일찍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조숙하다는 평을 듣던 저는 서너 살 무렵부터 현실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환상이 없었습니다. 밖에서도 환상을 접할 기회가 잘 없었습니다. 집에 책이 없어서 초등학교 시절은 달콤한 ‘꿈 이야기’를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통해 ‘환상’을 만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저는 전능감은커녕 최소한의 자존심도 버린 채 철저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멀쩡한 제 답(거북선은 군함이다)을 틀리게 매기고, 부유한 부모를 지닌 경쟁자의 답(거북선은 잠수함이다)을 맞게 매긴 선생님에게도 제대로 항의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그저 선생님의 무지를 원망했을 뿐입니다). 그런 게 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인생 초기의 유아적 전능감을 제때에 버리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까지 트러블 메이커로 사는 이들을 보면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인물들 중에서 특히 ‘몽실언니’나 ‘검정고무신’ 숭배자가 많이 발견되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면서 제 자신은 끝까지 ‘왕자와 공주’로 살려고 하는 것 같아서 답답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