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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내가 그를 만난 건 십여 년 전이다. 나는 그를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고 그는 허공 같은 인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은 그의 군 입대 날이었다. 팬들을 향해 큰절을 하고 일어선 그의 젖은 눈동자를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를 영원히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인기가 한창인 배우였으므로 그의 신상을 조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학력이나 가족관계, 여자 친구에 관해서까지 순식간에 내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무엇보다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나 영화를 빠짐없이 조사했다. 그때까지 출연했던 드라마가 많지는 않은 편이어서 그날로 그것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스페이스’라는 그의 팬 카페에 가입을 했다. 드라마 속 그는 훌륭한 연기력의 소유자였고 각종 인터뷰 속의 그는 진중한 청년이었다. 그의 팬 카페를 통해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내 마음대로의 양식으로 써진 글이었다. 어느 날은 수필이었다가 어느 날은 시였다가 어느 날은 소설이 된 적도 있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책상에 앉으면 그에게 쓰는 편지를 시작으로 나의 하루 작업이 출발되곤 했다.

그때 나에게 현빈이라는 배우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허상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고 실제이기도 한 존재였다. 십 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 가졌던 궁금증들은 이미 사라졌다. 다만 남은 건 그 순간 변화해 가던 내 모습이다. 실재하는 인물이 나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브라운관을 통해서만 존재가 되던 그는 허상이나 다름없었다. 종교인들이 가진 맹목성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빛깔로 따지자면 하여튼 그것은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좋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허상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좋고 아무 꿈도 꾸지 않는 것보다는 악몽이라도 꾸는 게 낫다. 에베레스트가 유명해진 데에는 그 산이 아무나 오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 있을수록 꿈꾸는 시간은 길 것이며 불가능할수록 그 꿈은 오랫동안 달콤할 것이다.

내가 내 문학의 시간 속으로 현빈이라는 배우를 불러들인 것은 그런 차원이었다. 그는 내게 먼 산이었고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여도 아무도 욕하지 않았으며 그를 향해 삿대질을 하여도 아무도 나를 나쁘다 하지 않았다. 나는 편안하게 그를 빌려 썼고 그는 한 마디의 긍정도 부정도 없이 내 책상 위에서 혹은 양치 컵 속에서 웃고 있었다.

가능하지 않은 현실을 꿈꿀 때 오는 달콤함은 특별하다. 현실을 비관하고 비판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지도 모른다. 손 내밀면 금방 닿는 동전보다는 팔을 뻗다 결국은 플라스틱 자를 동원해서 꺼내는 소파 밑의 오백 원짜리 동전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현빈에게 날마다 편지 쓰기를 시작하고 일 년 즈음이 지났을 때 나는 시를 쓰는 일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어떤 주제 앞에서도 멈칫거리지 않을 수 있었고 말더듬이처럼 끊어지곤 했던 문맥이 제 흐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빈은 나에게 제대로 된 시 쓰기 연습을 시켜준 셈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배우 현빈은 여전히 군 입대 날을 맞고 있다. 모자를 벗어들고 짧은 머리를 드러내며 겸연쩍게 웃다가 눈시울을 적시는 어린 사슴이다. 지금 그는 어떤 모습으로 배우의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고 그가 바로 내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나는 그를 몰라볼지도 모를 일이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꿈을 꾸기 위해 오늘도 잠을 자고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꿈꿔도 현빈이 내 앞에 나타날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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