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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말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동물이다. 속도의 개념을 인식하며 인류사는 활발히 움직였다. 정보 전달이 신속해지고 대량의 물품이 빠르게 운반됐다. 또한 기마 전술과 전차의 활용으로 전투력이 강해졌다.

몽골군은 가벼운 복장을 갖춘 기마병 집단이다. 병력 전체가 경장 기병으로 편성됐다. 재빠른 공수로 상대를 압도하면서 거침없이 정복했다. 몽골 제국은 말의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 한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양 제국으로 세력이 교체된다. 바야흐로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절대 왕정의 유럽은 선박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고 원주민을 약탈했다. 16세기 아시아로 진출한 포르투갈과 아메리카로 나아간 스페인이 지배적 지위를 누렸다. 17세기 전반엔 네덜란드가 주도권을 잡는다. 상인 국가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윽고 그 중반엔 프랑스를 제압한 영국이 패권을 잡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 자체를 지배한다’ 영국의 탐험가 월트 롤리 경의 설파. 강대국은 전략적으로 대양의 제해권을 추구한다.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는 동기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도 해군의 역할이 막중하다. 중국과 일본을 이웃한 지정학적 위치로 당위성이 더해진다. 나는 육군에 복무한 탓으로 해군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다. 멋쟁이 복장으로 승선한 수병이 부러웠다.

근래 ‘율곡이이함 해군 가족 초청 행사’가 열렸다. 부산항에 정박한 함정에 올라 선내를 둘러보는 민군 소통의 이벤트. 마침 조카가 근무하는 지라 기회를 얻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두 번째 이지스 구축함. 제원에 의하면, 배수량 7650톤, 전장 166m, 승조원 3백 명 내외, 그리고 미사일?레이더?소나?작전용 헬기 2대로 무장됐다.

실내에 설치된 ‘율곡역사관’과 ‘율곡이이함 연대기’가 특별했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이자 병조판서(오늘날 국방부장관)를 지냈다. 오천 원권 화폐의 인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발발 전 왜적의 침입에 대비코자 10만 양병을 주장했다. 국난에 대비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기리고자 명명하였노라 배경을 밝힌다.

개인적으로 괜찮은 작명이라 여긴다. 건물 또는 장소에 명칭을 붙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다. 단순한 객체에서 의인화된 인격이 부여된 존재로 변한다. ‘DDG?992’보다는 깊은 울림을 품은 호칭.

선체는 갑판이 아닌 해수면 기준으로 지상과 지하가 나뉜다. 지하 1층에 승조원 침실이 있었다. 소위 해면 아래서 취침하는 셈이다. 몸 하나 겨우 누울 공간. 잠결에 벌떡 일어나다간 천장에 코를 박을 옹색한 크기다.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른 고대 로마 제국의 ‘팍스로마나’는 막강한 군단을 보유했기에 가능했다. 주변의 야만족(?)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3세기 접어들면서 73년간 22명의 황제가 바뀌는 위기를 맞는다. 방위선은 무너지고 혼란이 가중되면서 쇠망의 길을 걸었다.

유비무환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서경에 나오는 글귀. 기원전 어록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안보에 관해서는 그러하다. 율곡의 십만양병설, 그 혜안을 새삼 떠올린 계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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