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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해마다 이맘때쯤 이면 한 해 동안의 수고에 감사하는 인사를 말로든, 글로든 지인들에게 전하곤 한다. 이럴 때마다 으레 따라붙는 것이 ‘다사다난’이라는 수식어다. 늘 그렇듯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따져보면, 결국 이런저런 일로 생긴 크고 작은 어려움을 해결하느라 바쁘게 지낸 기억들뿐이니 딱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까닭일 게다. 그러니 ‘다사다난’이란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복잡한 사회관계 틈바구니에서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달리 말해, 일도 많고 탈도 많은 현실의 삶을 그럭저럭, 대충, 책임 회피하며 살지 않았다는 자기 고백일 수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을 포함한 성인남녀 총 2,917명을 상대로 ‘올 한해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한 사자성어’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여기서 전체 응답자의 14.2%가 응답한 ‘다사다망(多事多忙)’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즉 ‘일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난 한 해를 보낸 사람이 그중 제일 많았다는 얘기다. 그 뒤를 이어 ‘고목사회(枯木死灰)’-말라 죽은 나무와 불이 꺼진 재-가 2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구직자들이 가장 많이 꼽은 사자성어이기도 하다. 직장을 구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녔건만 아무런 소득이 없어 자신의 처지가 ‘말라 죽은 나무와 같고 불 꺼진 재’처럼 무기력하기만 했던 한 해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영업자들이 가장 많이 꼽은 ‘노이무공(勞而無功)’으로, 애만 썼지 얻은 거라곤 하나도 없는, 일 년 동안 헛수고만 한 것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들 세 사자성어들이 지닌 함축적 의미를 고려할 때, 우리사회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 지 새삼 깨닫게 한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용악화로 청년들의 일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됐고, 그나마 비정규직으로라도 어렵사리 취업해도 ‘위험의 외주화’에 등 떠밀려 죽음의 작업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들의 불공정한 가맹계약과 제 살 깎기 식 경쟁으로 일 년 365일, 온종일 일해도 자기 인건비는 고사하고 높은 임대료를 충당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서민경제는 내리막길이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저녁 있는 삶’을 기대했지만 재계의 우려와 언론의 불안감 조장으로 직장인들은 ‘다사다망’의 굴레를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사회가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중증을 보이고 있는 우리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과 해결 의무를 지닌 정치권과 관료집단들은 올 한해를 어떻게 보냈을까. 역시나 올 한해도 천하태평이었다. 일반국민들은 팍팍한 삶을 사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도 국회의 개점휴업 상태는 여전했으며, 일자리를 찾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청년들이 허탈해 하는 순간에도 정치인과 관료들은 권력과 지위를 앞세워 뒷문으로 자기 사람을 밀어 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서민들은 장사하느라 하루도 못 쉬고 죽어라 애만 쓰지만 정치인들은 국가의 한 해 예산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단 며칠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정하고는 지역구 예산 확보에 대단한 공을 들인 양 생색내느라 바쁘기만 하다. 매년 반복되는 이런 웃기지도 않고 서글프기만 한 행태를 기필코 바꿔야 된다고 아무리 국민은 목청을 높여도 여전히 들은 체, 만 체로 또 일 년을 보낸 것이다.

중소기업단체가 전국 500개 중소기업을 상대로 내년도 경영환경 전망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24.8%가 ‘중석몰촉(中石沒鏃)’이란 사자성어로 답을 했다고 한다. 대내외적으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여건이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서 온 힘을 다하다 보면 ‘돌에 화살이 깊숙이 박힌 것’과 같은 놀라운 성과를 얻을지 모른다는 희망의 의지를 나타낸 걸로 보인다. 매번 기득권층에 대해 절망하지만 힘없는 다수는 여전히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다사다망’했고, 그들은 ‘천하태평’이었던 한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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