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소재 포항흑구문학관의 모습 이은성 기자 sky@kyongbuk.com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한흑구의 수필집 ‘동해산문(1971년)’에 실린 ‘보리’ 중에서-

‘단 한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작가’로 인정받으며 포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흑구(黑鷗) 한세광(1909년6월19일~1979년11월7일·이하 한흑구)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한흑구’라는 문화 콘텐츠를 활용해 지역문화 활성화를 꾀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문화산업이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핵심 산업으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가운데 ‘한흑구’라는 큰 인물은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 충분하다고 입을 모았다.

△수필 ‘보리’로 유명한 한흑구
한흑구
수필 ‘보리’로 잘 작가로 알려진 한흑구는 애국청년작가이며 미국문학 번역자로 장르의 경계를 허문 대표적인 작가다.

1948년 포항으로 거처를 옮기고 영일만과 청보리밭 등 자연을 소재로 시적구성의 아름다움과 생명과 인생에 대한 관조가 돋보이는 수필로 한국 수필문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인들은 “한흑구의 수필은 문학인들의 교과서같은 존재”라며 “‘수필은 시처럼, 시는 수필처럼’ 쓴 작가로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문장이 아주 감성적이고 아름답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수필 ‘보리’는 겨울의 추위를 견디면서 생명을 이어오다가 마침내 봄을 맞아 결실을 맺게 된 보리의 모습을 기도하는 성자에 비유하고 있다.

한낱 작물에 지나지 않는 보리의 생장 과정을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도 오히려 겸손한 성인의 삶에 견줌으로써 그 생명력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제 2의 고향 ‘포항’
흑구문학관
1948년 한흑구 선생이 포항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지역 문화 부흥이 시작됐다.

지역 문화계 인사들은 “한흑구 선생을 주측으로 문학뿐 아니라 문화전반적으로 활발한 활동이 펼쳐졌다. 흑구 선생은 지역과 서울 중앙문단의 연결고리였다. 지역 문인들이 중앙문단으로 진출하는데도 주춧돌이 됐다”고 증언했다.

미당 서정주 작가의 말에 따르면 당시 중앙문단의 가난한 문인들의 용돈관리를 했을 정도로 인맥과 신망이 두터웠다는 것.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소재 포항흑구문학관의 모습 이은성 기자 sky@kyongbuk.com
중앙 문인들과의 인맥으로 지역에서 대단한 예술가들의 강연회가 이어졌고, 화가초청 전람회 등을 주선하게 된다. 그것이 지역 문단을 이끈 ‘흐름회’다.

김일광 동화작가는 “어릴 때 흐름회 주최 백일장에 참여한 기억이 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를 창단한 장본인도 한흑구다.

당시 한국문인협회 정식작가 3명이 등록돼야 지역 문인협회를 창단할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 한흑구, 손춘익, 빈남수 작가가 있었다.

박이득 작가는 “한흑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포항문인협회 창단을 위해 힘쓰셨다. 1979년 8월에 포항문인협회를 창단하고 그해 11월에 돌아가셨다. 포항문인협회 81년 창간호 특집에 ‘한흑구선생의 삶과 문학’을 다뤘다”고 설명했다.

한흑구의 장남 한동웅 씨는 “아버지께서는 1948년에 문인들과 경주로 답사를 내려왔다가 기차를 타고 포항을 방문하게 됐는데, 기차역에서 송도해변과 송림이 보였을테다. 따뜻하고 깨끗한 공기의 해양성 기후에 반해 살기로 결정하고 바로 이사를 내려왔다”며 “1979년11월7일 돌아가실 때까지 포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고 증언했다.

△자칭 ‘검은 갈매기’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소재 포항흑구문학관의 모습 이은성 기자 sky@kyongbuk.com

한흑구를 연구 중인 한명수 박사는 “작가 한세광을 ‘흑구’라고 하는 것에는 작가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흑구’는 검은색을 띤 갈매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검은 갈매기’라는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한세광 작가 자신이 ‘흑구’라고 하면서도 ‘검은 갈매기’ ‘검갈매기’라고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흑구라는 필명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이 필명을 매우 아꼈다.

한 박사는 “‘검갈매기’ 한세광은 ‘어느 색에도 물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의 색’을 지니고 일생을 살았으며,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항해야 하는 갈매기 같은 신세’와 같은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설명했다.

△ 수필 넘어 문학적 재평가돼야

최근 한흑구 문학세계를 수필에 국한시킬 필요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흑구는 6여년의 미국생활 중에서도 1930년 '우라키'에 ‘쉬카고 한셰광’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라는 시를, 이후 홍콩에서 발간되던 '대한민보'에 시와 평론을 다수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귀국해서는 미국생활을 바탕으로 시, 소설, 평론 등의 작업들도 꾸준히 진행했기 때문에 작품량도 상당하다. 

한 박사는 “한흑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그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수필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에 시인이요, 소설가임을 알고 있다. 또한 문학평론가요 영문학자로서 많은 활동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흑구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6세 무렵부터 시를 썼다고 하지만, 당시의 작품이 전해오는 것은 없고 1929년 미국 유학 시절 쓴 작품들이 초기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한 박사는 “문단의 후배들이 2009년 한흑구 탄생 100주년을 기점으로 문학선집을 펴내고, 흑구문학상을 제정해 그 발자취와 문학정신을 기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발자취와 문학정신을 기리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의 문학작품과 문학사 연구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흑구에 관한 연구가 없지는 않지만, 향후 좀더 활발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더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한 박사는 “그 연구 방향은 그의 문학사 전반에 관한 총체적 연구와 구체적 장르 중심의 세부 연구, 이를 바탕으로 그가 창작한 다양한 장르간의 관계성 연구 등으로 진행돼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 그의 초기 작품활동시기와 그 작품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남현정 기자
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사회 2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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