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 근간이 태동된 곳…영남사림 마음의 고향
창건 후 17년이 지난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 이 지역 의병들이 금오서원을 근거지로 작전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군량미를 저장하기도 했으며 은신처 등으로 이용하는 등 사령부 역할을 하자 왜군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그 후 선조 35년(1602년)에 김 용 선산도호부사가 안강 노씨 문중의 소유지인 선산읍 남산 아래 서원의 터를 얻어 이전 중창했다.
중창 후 금오서원은 야은 선생을 비롯해 점필재 김종직, 신당 정붕, 송당 박영을 추가로 이어 인조 20년인 1642년에 여헌 장현광 선생을 추가로 배향, 5현을 400여 년 동안 지역 사림들이 해마다 제향을 올리며 유생들이 학문을 강론하는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종 5년인 1867년에 이르러 서원 철폐령이 내려져 전국의 많은 서원이 훼철됐고 사십칠개 서원만이 존치하게 됐는데 그 가운데 금오서원은 존치하게 됐음은 이 서원의 위상을 미뤄 짐작 할 수 있다.
△금오서원 학맥도.
하지만 야은 선생은 처음에는 충절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나중에 문절이란 시호로 바꾸어진 것으로 보아 충보다는 문에 더 치중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확립된 조선 성리학의 도통은 흔히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으로 연결된다.
이 가운데 길재 선생으로부터 김굉필에 이르는 4대의 선비들이 모두 선산지역과 직간접으로 연결을 맺고 있어 조선 성리학 발전에 야은 선생의 문하가 토대를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오서원 구조
사당인 상현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5량 형식의 가구구조로 전면의 공포 부분은 출목이 있는 익공형식으로 되어 있다.
전면 3칸에는 매 칸마다 2짝씩의 널문을 설치했으며 기단은 자연석으로 마감하고 양단부에 계단을 설치했다.
강당인 정학당은 중앙의 3칸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5량 형식의 가구구조이다.
양 협실의 전면으로는 튓마루를 두었으며 대청 후면 3칸에 영쌍창이 설치되어 옛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원의 진입공간으로 사용되는 문루인 읍청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의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 있다.
누하에 출입문을 설치했고 누상에는 서원쪽을 개방하고 외부는 창을 두어 반 개방적 성격의 공간을 구성했다.
경내에는 시판, 기판이 있으며 서원 중수 당시 부사였던 김용의 업적을 기린 공적비 1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