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황해도 곡산을 다스리는 도부사(都府司)에 대한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쌀 두 말 받을 세금을 아홉 말을 받아 농민들을 착취했기 때문이었다. 주민 중에 말 잘하고 똑똑했던 이계삼이라는 농민이 동네 주민 천여 명과 함께 관아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아전과 관노들이 몽둥이로 주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선량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다고 잡혀가면 일이 커질 것이라고 판단한 이계삼은 일단 도망쳤다.

관아에서는 이계삼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나 농민들이 지켜주는 바람에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곡산에 민란이 났다는 소문이 한양까지 전해져 조정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산 정약용을 새 부사로 임명, 현지에 급파했다. 다산이 곡산에 도착하자 더벅머리 사나이가 나타났다. 바로 이계삼이었다. 그는 백성의 고충을 쓴 종이를 다산에게 건네주며 이 문제를 해결해 주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고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방이 이놈을 당장에 포승줄로 묶고 칼을 씌우자고 했다. 다산은 자수한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관아로 데리고 가 재판을 열기로 했다.

다산은 이계삼이 올린 항목들을 세밀히 확인한 뒤 판결을 내렸다. “관이 현명하지 않은 까닭은 민이 제 몸을 제몸 꾀하는 데만 재간을 부리고, 관에 제대로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이 밝히지 못한 것은 백성들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해 스스로 몸을 사리는 데만 열중,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을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판결 요지였다.

“이계삼은 관의 잘못에 용기 있게 항의하고 시정하도록 목숨 걸고 싸웠으니 상을 받아 마땅하거늘 처벌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면서 풀어주었다. 애민정신이 철두철미했던 다산은 민중의 저항권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민간인 사찰의혹’, ‘적자 국채 발행 기도’ 등의 폭로를 기밀누설로 몰아 검찰에 고발하고 인신공격으로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는 공익제보자들에 대한 핍박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내로남불 정권’에 의한 공익제보자 수난은 전제군주 때도 민중저항권을 인정한 다산이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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