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정치가·의병장 활동으로 배움 실천한 선비정신 오롯이

도잠서원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0호이며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 선생의 학덕과 충의를 기리는 도잠서원(道岑書院)이 세워져 있다.

서원은 1612년(광해군 4) 지방 유림들이 모사리에 사당을 짓고 서재(書齋)를 강당으로 삼아 지산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며 배향해오다가 이듬해 조호익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봉서원(芝峰書院)이라 했다.
도잠서당
이후 1678년(숙종 4) 현 위치인 대창면 용호리로 이건, ‘도잠’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현 배향과 지역의 유생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14년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 정부의 지원으로 중수했다.

도잠서원은 도산서원과 같이 직접 선생이 제자들에게 강학하고 사후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 창원 출생이다. 증조부는 중종때 청백리로 녹선된 치우로 사옹원정이고 조부는 예조정랑을 지낸 효연이며 그의 부는 윤신이다.



△퇴계 이황선생 문하에 들다

당시 영남은 좌도에 퇴계 이황, 우도에 남명 조식 선생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산은 17살에 퇴계 선생 문하에 입문했다. 그 시기에 벌써 16세 때 이미 대과초시에 합격할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수재였다.

19세 때 창원에 있는 지산의 집을 방문한 퇴계 선생에게 ‘대학’을 21세에는 ‘주자어류’,‘근사록’ 등의 책을 강독하고 질문하는 열의를 보이며 성리학의 핵심 전적을 공부함으로 퇴계 학파의 중심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지산의 학문은 유학을 근간으로 하고 역학, 예학 등에 조예가 깊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가 추구하는 바는 유학 편향적인 것이 아니라 불교 등 제 학문에도 연관을 짓고 있다.
성모묘 사당에서 향사를 올리고 있다
학문을 하는 것은 자기를 완성하는데 있고 나아가 배운 바를 실천하는 것으로, 선비들이 서원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시연하는 것도 결국 예의와 겸손을 익히는 자리이며 나아가 책에만 파묻혀 있는 선비 상이 아니라 문무 겸전의 특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즉 시문에 연연하지 않고 근원에 대한 것, 즉 일원 (一源)이 가장 중요함을 제자들을 보내면서 주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의 핵심은 심성(心性)이다.

바로 학문의 요체가 구구한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순수한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고 근본임을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산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학문영역 중 예학과 역학에 뛰어났다. 일평생 주역을 공부하면서 운명하는 순간에도 “내가 없어서 서운해 할 것”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주역’을 애독했다.



△사우 및 문인

백운동 서원의 설립을 주도한 주세붕의 아들인 주박,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유성룡·이원익·김성일·이항복·이이·이덕형·곽재우·기대승 등 당대를 대표하는 이들이 우인(友人)들이다.

문인으로는 김육·박대덕·이시직·이정남·조경·이희백·김응택 등 관서지방과 경기지역, 영천지역 등 여러 곳의 문인들이 지산문하에 출입했다.

영천의 문인인 정사진의 예설에 대한 질문과, 복재(復齋) 정담(鄭湛)이 제례(祭禮)에 관하여 논한 편지를 보내오자 상세히 그에 대한 답을 적어 보내 주기도 했다.



△당대의 평가

선조(宣祖)가 어느날 기대승(奇大升)에게 조선의 인재가 누구냐고 묻자 “율곡 이이, 한강 정구, 취원당 형제(조호익과 그의 중형 광익)”라고 대답 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찍이 학문에 정진하여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일평생 학자로 교육자로 정치가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학문과 현실을 충실하게 실천했던 학자였다.

퇴계 문하 동문인 류성룡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징비록’에서 벼슬하지 않은 선비가 관록을 먹고 있는 자신들보다 국가를 위한 우국충정의 자세를 높게 평가해 지산 조호익의 충의정신을 잘 기리고 있다.

또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졸수당과 망회정에서 지산이 항상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생 동안의 정신과 안목이 하루라도 성현의 글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하지 못할까 무엇을 근심하겠으며 사사로운 욕심이 어디로부터 그 사이에 침투하였겠는가” 라고 말했다.



△의병활동 및 관직활동

임란의 분수령의 하나였던 평양성 전투에 대하여 명나라 장수 오유충과 낙상지는 지산에 대해 “평양의 전투에서 조선의 여러 장수들 중 과감하게 먼저 성에 오르는 자가 없었는데, 조호익만은 우리를 따라 사지(死地)로 들어갔다. 의기가 몇 배는 충천하였으니 조호익의 충성스러운 담력은 따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평양성 공격에 이어 임진강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조호익은 임해군과 광해군이 함경도에 들어갔다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내 발길을 함경도로 옮겼다. 영흥(永興)에 이르러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뒤를 밟아 잇달아 싸워 승리하였다. 후퇴하는 왜군을 쫒아 양주에 이르러서는 요로(要路)에 복병을 설치, 왜적들을 습격하여 대파했다. 연이어 전과를 올리자 선조는 지산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칭찬하였고 녹비(鹿皮) 1령(令)을 하사했다.

또 지산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류성룡의 추천으로 1592년 5월 의금부도사를 시작으로, 장례원사평, 형조 정랑, 통정대부로 그 해 12월에 승진하여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1593년(선조 26) 6월에는 대구 부사, 성주목사, 안주목사를 역임하고 1596년(선조 29) 8월 성천부사가 되었다. 그 해 정주목사가 되어 3개월 만에 병으로 체임하였고 1600년(선조 33) 울산에 소모관으로 잠시 제수된 뒤 영천으로 은거한 후에도 교정청 당상관, 선산부사, 남원부사 등을 계속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다.

지산이 임란이 발발하여 유배생활이 끝나고 난후 7년여 관직생활 중 실제 벼슬살이는 4년6개월에 불과하였으나 관직을 제수받아 그 소임을 다했다. 세속적인 권세나 명리(名利)가 아니라 학문과 충절의 삶 속에 있었던 지산은 그 나머지 부분도 전쟁터에서 의병으로서의 험난한 과정 속에 보냈다.

이밖에도 지산은 1576년 경상도도사 최황에게 반항한 죄로 강동에 유배되어 학문의 불모지인 관서지방에 후진 양성과 문풍을 크게 진작시켜 선조임금으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어필을 하사받았다. 부자(夫子: 덕행(德行)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으로 조호익이 유일하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도잠서원, 성천의 학령서원 강동의 청계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문집으로는 ‘지산집’ 외 ‘주역석해’, ‘가례고증’, ‘심경질의고오’, ‘대학동자문답’ ,‘지산필화’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는 주역과 예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가례고증’은 중국 구준(丘濬)이 편찬한‘가례’에 관해 어려운 부분을 고증하여 알기 쉽게 풀이한 책으로 가례의 해석 및 연구에 참고자료가 되며 우리나라 학자가 만든 최초의 주석서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도잠서원 구조 및 규모
도잠서원1
서원의 구조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인 희안재(希顔齋), 서재인 봉원재(逢原齋), 중앙에는 강당인 회만당(會萬堂)이, 사당인 성모묘(聖慕廟)는 강당 뒷편에 있으며, 숙종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에서 “내가 깊이 사모한다”(우여심모·寓予深慕)고 하여 병와 이형상이 묘우이름을 지었다.

규모는 묘우(廟宇)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평이 9.4평이고 내삼문(內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강당(講堂) 정면 5칸, 측면 2.5칸, 동재(東齋),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도잠서원 비석
지산 조호익은 1603년(선조 36년) 2월, 영천 도촌(陶村)에서 지산촌(芝山村)으로 이거(移居)한 후, 오지산(五芝山) 아래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서재(書齋)를 완여(翫餘), 정자(亭子)를 망회(忘懷)라 하며 은거했다.

그리고 못을 막고 복숭아 나무를 심어 도화담(桃花潭)이라 하고 못 가운데에 대(臺)를 지어(知魚)라 했다.
지산선생 묘
지산은 1609년(광해군 원년) 8월 18일 유시(酉時)에 망회정(忘懷亭)에서 역책(易?)하시고 그해 12월 25일 영천군(永川郡) 남쪽 송청산(松靑山) 터에 증조부 정우당공(淨友堂公)의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사림들은 1613년(광해군 5년) 12월 4일 재회하여 위판(位板)을 봉안하고 지봉서원(芝峰書院)이라 했다.

선조 40년 난리에 서당이 소실되었다가 1634년(인조 12) 9월에 성천부사(成川府使) 김언(金?)이 고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모의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제향(祭享)했다.

지봉서원(芝奉書院)의 유생 정시간 등이 소(疏)를 올려 1678년(숙종 4년) 3월에 도잠서원(道岑書院)이란 편액(扁額)을 내렸다.

하사한 제문 가운데 ‘내가 깊이 사모하는 뜻을 전한다(寓予深慕)’는 하교(下敎)가 있었기 때문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사우(祠宇)의 이름을 성모묘(聖慕廟)라 지었다.

1868년(고종 5년) 방령(邦令)에 의해 서원이 훼철(毁撤)되었고 1876년 망회정 곁에 도잠서당(道岑書堂)을 건립했으나 이내 소실(燒失)됐다.

1917년 망회정 뒤편에 도잠서당을 중건하고 9월 25일 도향(道鄕) 및 영천유림이 도잠서당을 수계(修契)했다.

1977년 도잠서당이 문화공보부에서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건조물 제 109호로 지정 고시되고 1985년(乙丑) 서당이 다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0호로 변경 고시됐다.

매년 음력 2월 중정일에 도잠서원 향사를 올리고 있다.

권오석 기자
권오석 기자 osk@kyongbuk.com

영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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