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민중사상 근원 이룬 향가와 음악

신라왕경 지역.

경덕왕 시대는 충담사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짓는 등, 문화도 발달하고 정치도 잘 되었는데, 달이 차면 기울 듯 번영을 자랑하던 신라도 혜공왕 이후로부터 기울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탄생에 얽힌 기음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경덕왕은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여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하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후비(後妃)로 봉하니,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였다. 어느날 임금이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궁에 갔다와서 이르기를, 상제께서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자, 경덕왕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하니, 이제부터는 다니지 말도록 하시오.” 표훈은 돌아와 천제의 말을 전하니,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국왕이 죽어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혜공왕은 어릴 때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는 등 늘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 왕비와 함께 죽었고 이 난을 평정한 상대등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선덕왕이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내물왕계의 김경신과 무열왕계의 김주원이 경쟁하였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알천이 범람하여 시중 김주원이 건너지 못하는 사이, 상대등 김경신이 먼저 들어가서 등극하니, 곧 원성왕이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과 손자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표훈대사의 말이 들어맞은 셈이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원성대왕은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을 수가 있었다. 원성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1,000냥을 가지고 와서 보기를 청하였으나, 빌려주지 않았다.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은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이 김응렴이었는데, 18세에 국선에 올랐다. 약관(弱冠)에 이르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이 그를 불러 잔치를 베풀며 사방을 돌아다니며 특이한 일을 본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응렴이 세가지 아름다운 일을 보았다 하며, 남의 윗자리에 있을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게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 귀(貴)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이라고 대답했다. 헌안왕은 그 말을 듣고 낭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두 공주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아내로 삼기를 청했다. 낭(郞)의 부모가 놀라고 기뻐하면서 의논하기를, “임금님의 맏공주(公主)는 용모가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 하니 그를 아내로 삼으면 좋겠다.” 하였다. 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리로 있는 범교사(範敎師)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가서 낭에게 맏 공주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다며 극력 권하였다. 낭이 결혼한 3개월이 지나서 왕은 운명하며 아들이 없으므로 응렴이 왕위를 잇게 하니, 곧 경문왕이다. 이에 범교사는 말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그 하나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 공주에게 이제 쉽게 장가드실 수 있게 되신 것이 그 둘이요,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대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겨서 대덕(大德)이란 벼슬을 주고 금(金) 130냥을 하사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르자 경문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는,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는 소리가 났다. 국선 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을 유람하는데 은근히 임금을 위해서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를 짓고, 다시 심필(心弼) 사지(舍知)를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노래 세 곡을 짓게 하니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요,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었다. 대궐에 들어가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여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경문왕은 그래도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경문왕이 바로 유명한 최치원의 ‘난랑비서(鸞?碑序)’의 주인공이라는 학설이 있다. 다음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신라 하대라 하더라도 번영을 이루었다.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으며, 악기와 노랫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헌강왕 시절 ‘처용가’가 불리어졌고 나라가 쇠퇴할 조짐을 산신(山神)들이 보였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주색(酒色)을 더욱 즐기다가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한다. 이상 신라에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민중사상의 근원으로 화랑도가 유지되었고 향가와 음악이 발달하였으며 이들은 나라의 흥망과도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