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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22. 칠곡 곤산서원

올곧지만 따스한 옛 선비 발자취 따라 '군자의 도' 배워요

박태정 기자 ahtyn@kyongbuk.com 등록일 2019년01월23일 17시41분  
곤산서원 전경
평산신씨 약목종중(사무국장 신명균) 자료에 따르면 1727년(영조3) 향내 사림의 발의로 보인계를 경영해 1772년(영조48) 향촌리 후록 곤산에 서당을 건립 후 진정 선생과 극재 선생의 강학과 유업을 이어왔다.

진정 선생의 휘는 우덕(1581~1663)이고 자는 여가이며 사시는 진정으로 고려태사 평산신씨 시조 장절공 휘 숨겸의 22세손이며 파조 제정공 휘 효창의 8세손으로 넷째아들 류의 귀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추증됐고 일고 1권이 있다.

극재 선생의 휘는 익황(1672~1772)이고 자는 명중이며 호는 극재로 진정선생의 증손으로 둘째 아들 염의 귀로 증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됐다.

유고로 극재문집 13권 7책이 있다.
곤산서원 현판
1783년(정조7)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세덕사를 곤산에 건립해 진정 선생과 극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해 오다가 1786년에 서원으로 승호돼 1836년 봄 사우 경도사와 강당 명교당과 동재 서재와 문루를 갖추었으나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손됐다가 136년이 지난 2004년 곤산서원을 복원한 후 매년 3월 중정일에 행사를 복원하고 있다.

△추원당

이곳은 진정공 휘 우덕과 아들 판서공 휘 근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로서 본당은 건물이 협소하고 퇴락해 구건물을 철거하고 신축(1996년 3월~1997년 5월)했다.
지역 유림들이 곤산서원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지역 유림들이 곤산서원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거향 종족이 수시로 모여 경조돈목하는 신씨문중의 종실이고 현재는 곤산서원과 병행해 사용하고 있다.

△배향인물

1)신우덕(申祐德·1581~1663)

자는 여가(汝嘉), 호는 진정(眞靜), 본관은 평산, 판서 효창의 후손이며, 증공조참의 계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놀음놀이가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다. 한번은 중국사람이 보고 하는 말이 이 아이는 덕이 구족(九族)을 덮을 사람이라 하고 중국으로 데리고 가려 했으나 공이 부모가 계시니 갈 수 없다 하고 굳이 사양하니 중국사람이 후하게 대접해 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약관시에 장여헌의 문하에서 천인성명의 학을 연구하고 덕성을 함양해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취했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전원에 은거하면서 모든 것을 선으로 지도함을 낙으로 삼았으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찍이 당대학자인 남파 장학이 공의 덕행을 칭찬하면서 면배에 나타나는 덕모는 어짐이 충만했고, 이목에 끌리지 않았으니 마음은 항상 고요했다라고 말하였으니, 그 뜻을 취해서 사시를 진정이라 했으니, 뒷날에 향인자제들이 진정 선생이라 부르게 됐다.

항시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근검 4자를 정령한 훈계를 했으니 그 때문에 대대로 충효하고 청백함이 현저했다.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약목의 곤산서원에 제향했다.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의 강진에 유허비가 소재하니 성산인 이기윤이 비문을 지었다.

2)신익황(申益愰·1672~172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아버지는 수사 명전(命全)이며 그의 조상은 원래 개성에서 살다가 중간에 서울로 옮기고, 5대조 때 경상북도 인동으로 옮겼다. 일찍이 박번(朴蕃)에게 글을 배워 진작 학문의 성취를 보았고, 21세에 향시에 합격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의 재주를 아껴 병조에서 과거에 응할 것을 종용했으나 사양했다. 그 학덕으로 인해 37세 때 천거돼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제수됐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46세 때에는 천거에 의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됐으나 왕에게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바로 돌아왔다.

그의 학문은 이현일(李玄逸)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27세 되던 해 5월에 이현일을 광양의 배소로 찾아본 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 면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전후 열 차례의 서면 질의를 통한 학문적인 문의가 있었다.

이들 질문과 토의 내용은 유학 전반에 걸쳐 광범하게 행해졌다. 특히 문제 삼은 것은 당시 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였다. 이현일을 만나기 이전의 그는 이황(李滉)의 설보다는 이이(李珥)의 설에 기울어져 있었다.

즉, 이와 기를 분개(分開)하기보다는 혼륜(渾淪)한 입장에서 보았다.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기의 발동(發動)에 있어서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아니라,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에 찬성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현일과의 학문적 교섭을 통해 점차 이황·이이의 사상을 동등한 차원에서 인정하려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기에서 더욱 철저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확연히 이이를 버리고 이황의 견지를 찬성하게 됐다.

그리해 그는 이를 한갓 무정의(無情意)·무조작(無造作)의 추상적인 사물(死物)이 아니라, 은연중에 능동(能動)·능발(能發)을 간직한 것이라 하고이(理)와 기(氣)를 확연히 둘로 갈라서 보았다.

이와 기가 한 물건(理氣爲一物)이라고 보는 이이의 주장에 반대, “이와 기를 구별하지 않고 한 물건이라고 하면, 마침내 욕(欲)을 이라 하고 기를 성(性)이라고 인정하게 된다”고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나누고 이가 선한 것임을 알 때 비로소 윤리가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사단이 칠정의 일부분, 즉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게 된 것중절(中節)이라는 주기설(主氣說)을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라고 했다.

그가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으로는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이재(李栽)·정사신(丁思愼)·권중도(權重道) 등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그가 죽은 뒤 43년이 지난 1765년(영조 41)에 아들 염(琰)으로 인해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됐고, 1784년(정조 8)에 사림들이 모여 그의 위패를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봉안했다.

편저에는 ‘극재집’·‘운곡도산휘음 (雲谷陶山徽音)’·‘경재집해 (敬齋集解)’·‘이기성정통간도 (理氣性情通看圖)’·‘동국승경와유록 (東國勝景臥遊錄)’등이 있다.

△건축물

경도사(景道祠)와 영모재(永慕齋), 외삼문으로 이뤄져 있으며 경도사에는 곤산서원에 배향된 신우덕(申祐德), 신익황(申益愰)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영모재에는 진정공 신우덕의 후손 다수의 신주를 봉안해 강당보다는 재실의 기능을 하고 있다. 2003~2004년에 평산신씨 문중에서 복원했다. 사당 앞에 비석 1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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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정 기자

    • 박태정 기자
  • 칠곡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