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철 자유기고가
태초에 낮과 밤이 갈리고, 세상이 만들어진 후부터 ‘이야기’는 존재했을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는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이야기에 탐닉된다. 특히 과거에 경험했던 아픔과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당시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 심리적 불안을 겪게 만든다. 이 경우 ‘이야기’는 공감과 치유의 기제가 되기도 한다.

고대 페르시아 전래동화 ‘천일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성 혐오증을 가진 공주의 치유를 위해 유모는 1001일 동안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데 결국 공주는 남자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없애고 페르시아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 ‘이야기’는 세월이 지나 이탈리아 극작가인 카를로 고치(1720~1806)를 만나 ‘투란도트’라는 희곡으로 태어나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남자를 혐오하는 투란도트 공주가 진정한 사랑을 얻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반전의 이야기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1858∼1924)는 카를로 고치의 대본을 바탕으로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투란도트를 만들었지만 완성하기 직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푸치니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완성을 결국 보지 못하였지만,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지금까지 공연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투란도트는 뮤지컬이 되었다. 대구시와 DIMF는 ‘뮤지컬 투란도트’ 제작하여 서울 장기공연과 중국 공연 등으로 아시아 뮤지컬시장에 진출하였으며 또한 국내 최초 슬로바키아 등 유럽 6개국으로 수출하여 뮤지컬 산업의 표본이 되었다.

사실 뮤지컬은 원작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대중성이 짙은 문화산업 장르다 보니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원형 콘텐츠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류의 ‘이야기’였던 투란도트가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의 전형으로 문화산업화 되는 과정을 보면, 인간을 이야기하는 인간, 즉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로 부르는 것이 납득이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향유하고 창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또 그 욕구의 실현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궁극적으로 자아를 만들어 간다.

그런 과정으로 고대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서사시가 동화가 되었고, 희곡으로, 오페라로, 그리고 뮤지컬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누구나 SNS 등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창작하고 전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호모 나랜스’의 전성시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호응될 수 있는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 그래서 순식간에 스토리텔링화 되고, 책 속에 갇혀 있던 이야기들은 최첨단 미디어 기술로 온갖 콘텐츠들로 새롭게 재현되며, 축제나 관광지 등의 오프라인 콘텐츠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문화가 콘텐츠가 되고 산업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밥’, ‘혼술’, ‘혼놀’이 대세인 혼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2만 년 전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문화는 공동체 속에서 생겨났다. 아마 그 공동체에는 생존을 위해 협력하거나 싸우고 경쟁한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오해와 갈등으로 생긴 크나큰 상처를 화해와 치유로 극복한 얘기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어릴 때 상처로 인해 우울증과 폭력, 자살 등의 파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조상의 한에 얽매여 스스로를 학대하고 상처 속에서 살던 투란도트 공주가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치유되는 모습에 관객들은 공감하고 환호하였던 거 같다.

공주의 남성 혐오증을 없애기 위해 해준 유모의 이야기는 이제 모든 인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원소스 멀티유즈의 표본’인 ‘투란도트 공주’의 이야기는 인류역사가 끝날 때 까지 계속될 거 같다.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경외심 가지며 기고를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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