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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여당의 현직 도지사가 지난 대선 당시 불법적인 여론조작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법정구속된 걸 두고 정치권의 공방이 뜨겁다. 야당, 특히 제1보수야당 일각에선 지난 대선 자체를 불법 여론조작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 대통령에 대한 수사마저 주장하고 나섰다. 여당은 판결 자체를 부정하며 사법부 차원의 음모론(?)까지 주장하는가 하면, 야당의 공세에 ‘대선 불복’의 프레임으로 대응하고 있다. 문득, 기시감(旣視感)이 든다. 지난 2012년 제18대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의 여론공작과 일명 ‘십알단’이라 불리는 단체의 댓글조작 행위가 있었음이 드러난 후, 당시 여당과 야당 간에 오갔던 공방과 판박이다. 입장만 바뀌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두 당이 구사하는 언어들이 어쩌면 그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지 정말 신기하다. 비록, 행위주체 면에서 두 사건은 분명 차원을 달리하지만, 정치 쟁점화 하는 과정만큼은 너무도 닮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언어습관 중 하나가 소위 ‘그때, 그때 달라요’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식인 것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법적 판결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신뢰’를 부정하는 부적절한 표현들을 마구 쏟아내지만 유리한 판결에 대해서는 ‘정의’를 추켜세우며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또한, 상대의 부정행위에 관한 의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정 사실화 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의혹 제기는 음해세력의 정치공작으로 몰아세운다. 이처럼, 처한 입장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니 일반인들의 귀엔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죄다 거짓으로 들릴 뿐이다. 신뢰도 면에서 국회의원이 만년 꼴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사상가 막스 베버는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이며 이러한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정치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정치인이 꼭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을 들었다. 즉, 제대로 된 정치인이 되려면 우선 ‘대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하고, 손에 쥐어진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데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책임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사람과 사물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인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자신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권력추구가‘대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채 순전히 개인적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때부터 정치가-직업의 신성한 정신에 대한 배반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순전히 권력 그 자체를 숭배하는 모든 행태는 정치력을 왜곡시키는 가장 해로운 행태’라고 비판했다. ‘정치에 의존해서’든 ‘정치를 위해서’든, 직업정치가로서 가져야 할 소명의식을 강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너무도 쉽게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권력, 즉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적 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업(業)으로 삼으면서도 직업정신 또는 직업윤리도 없이 그저 ‘개인적 자기도취를 목표’로 한다든가, ‘순전히 권력 그 자체를 숭배’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은 정치적 아마추어, 즉 단순한 ‘권력 정치가’들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거대정당들은 어쩌면 이러한 ‘권력 정치가’들의 집단일지도 모른다. 선거제 개편이라는 ‘대의’보다는 자신들의 정치권력 유지라는 사적 이익을 앞세워 결국, 별 성과도 없이 선거제 개편 합의 연장시한인 1월마저 넘겨버린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생전에 무소유의 법정 스님은 산중 암자 시절, 볼일이 있어 도심지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반드시 귓속을 물로 씻어내곤 했단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저잣거리에서의 각종 욕지거리와 버스 안 대중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원치 않는 소음으로 귓속이 탁해졌기 때문이란다. 비록 청정한 자연의 소리에 익숙한 수행자는 아니지만,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권력 정치가’들의 ‘아무 말 대잔치’로 귓속이 먹먹한 요즘, 필자의 심정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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