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연구 통해 인류애 실천 퇴계 가르침·정신 고스란히

이산서원
퇴계 이황하면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도산서원 못지않게 퇴계의 뜻을 기리는 서원이 영주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과 같은 해인 1574년(선조7) 사액을 받은 이산서원(伊山書院, 이산면 석포리 768-2번지)은 영주의 처음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군수 안상이 창건했으며, 1572년(선조5)사당을 세워, 이황의 위패를 봉안해 뜻을 기리고 있다.

이산서원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자 우리나라 서원 원규의 효시로, 퇴계 선생이 선조에게 올린 글인 성학십도(聖學十圖) 판각의 진본이 보관되었을 만큼 유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퇴계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영주 이산서원 경지당 현판.
“백성의 지도자가 된 분의 한마음은 온갖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고,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잡다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고 가지가지 간사함이 속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해 방종이 따르게 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오고 말 것이니, 어느 누가 이러한 위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애틋한 마음가짐으로 날마다 생활을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학십도 [聖學十圖] 中’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68세 때 평생의 학문을 정리해 새로 등극한 어린 선조에게 지어 올린 것으로 본래의 명칭은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로서 퇴계문집 내집과 퇴계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진(進) 차(箚) 병(幷)도(圖)의 글자를 생략하고 ‘성학십도(聖學十圖)’로 불려지고 있다.

그 내용은 새로 등극한 17세의 어린 선조(宣祖)임금에게 성학(聖學)의 요체를 밝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 횡거(橫渠) 장재(張載), 회암(晦菴) 주희(朱熹)등 저명한 유가(儒家)의 제설(諸說)중에서 중요한 것을 택하여 도판(圖版)과 해설을 붙인 것이다.

구성은 1장 태극도(太極圖), 2장 서명도(西銘圖), 3장 소학도(小學圖), 4장 대학경문(大學經文), 5장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장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장 인설도(仁說圖), 8장 심학도(心學圖), 9장 경재잠(敬齋箴), 10장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로 되어있다.

성학십도는 병풍용과 서적용의 두 종류로 판각되었는데, 이 성학십도 판목은 임진왜란 이전에 영주에서 판각했다가 산실된 후 1750년 전후에 다시 판각한 병풍용 판목으로 추정된다. 국내 유일본으로 이 판목은 퇴계의 성심이 담겨있는 서적으로 퇴계의 위패를 최초로 봉안한 이산서원에서 판각해서 수장해 온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

선조는 성학의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10가지 그림으로 만들어 올린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학문과 인격을 길렀으며, 후에 숙종조에는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산서원에서 소장하던 5매의 판목(앞뒤 10판)은 대원군 때 서원이 훼철되자 서원을 관리하던 문중이 돌아가면 관리하다가 형편이 여의치 않자 최종적으로 연암김씨 괴헌고택에서 오랫동안 관리해 오다 2004년 영주시에 기증해 현재는 소수서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영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문예를 숭상하던 선비고장으로 관사(館舍)가 없어서 선비들이 모일 장소가 없자 새로 부임한 안군수가 인재양성, 교학부흥에 뜻이 있어, 선비들의 뜻을 수렴하여 학사(學舍)를 건립했다.

이때 경비나 노역을 일체 민간에게 부담시키지 않는 등 선비정신을 실천해 주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이산서원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의 지명인 이산리에서 따왔으며, 경지당(敬止堂), 성정재(誠正齋), 진수재(進修齋), 지도문(志道門)등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당(敬止堂)만 남아 있다.
영주 이산서원 원규.
이산서원은 독서법 등을 규정한 원규를 만들어 당시의 서원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퇴계가 1559년 찬한 이산서원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서원이 정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원이다. 퇴계는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이는 수학(受學)·거재(居齋) 규칙, 교수 실천요강, 독서법 등을 규정한 원규를 만들어 당시의 서원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가운데도 퇴계가 1559년 찬(撰)한 ‘이산서원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규는 1)‘사서오경’을 근본으로 할 것. 2) 뜻이 바르지 못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자는 의논하여 배척할 것. 3) 서재에 조용히 앉아 독서하며 다른 서재를 찾아가 잡담하지 말 것. 4) 가급적이면 자주 출입하지 말 것. 5) 사물잠(四物箴)·백록동규(白鹿洞規) 등 좋은 경계의 말을 걸어 놓을 것. 6) 책이 외부로 여색이 안으로 출입하는 것을 삼갈 것. 7) 품관(品官) 가운데 사리를 알고 행의(行義)가 있는 자를 유사(有司)로 삼을 것. 8) 학생과 유사는 예의로 대할 것. 9) 서로 잘 구휼할 것. 10) 고을에 부임하는 자들은 항상 서원의 부흥에 힘쓸 것. 임시생도들은 재목이 된 후에 서원에 오르도록 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산서원 원규
원규는 이산서원 원규를 그대로 도산서원에 적용하고 있다. 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퇴계 선생께서 살아 계실 때 창건된 역동서원에 적용했고, 역책 후에는 도산서원을 비롯한 많은 서원에서도 적용했거나 이를 기본으로 제정했다.

특히 이산서원보다 먼저 창건된 함양의 남계서원(1552년 창건)의 원규는 이산서원 원규의 끝에 2조(條)를 더 했고, 이산서원보다는 늦게 창건되었지만 도산서원보다는 먼저 창건된 경주의 옥산서원(1572년 창건)은 소수서원과 이산서원 원규에서 중복되는 조항을 빼고 편집돼 있다.

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도 역시 이 원규를 세분화했다.

이산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이 없이 강학을 위한 기구로만 설치되었는데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1572년(선조 5)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제사의 기능도 갖추게 됐다.

이산서원은 옛 영천(榮川) 지방의 첫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광해군 6년(1614년)에 현 위치(이산면 내림리)로 이건했으며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8칸의 이산서당만 남아 있다가 경지당만 복원됐다.

유교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인정받아 지난 2010년 3월 경상북도 기념물 제166호에 지정됐다.

영주시에서는 영주댐 수몰지역에 있는 이산서원을 이산면 석포리로 이전하고 경지당, 지도문과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 동·서재 등 8개 동을 복원하고 있다.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의 교육적 이상을 실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선비정신과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학문연구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한 자아 성찰과 자기 고뇌의 산실이다.

이산서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퇴계 선생의 가르침과 정신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으로, 비록 세월의 흐름에 부침을 겪었으나 서원에 한 발 내딛는 순간 누구나 숙연해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유네스코가 말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주댐 수몰로 인해 이건공사 중인 이산서원 배치도
이산서원 이건 건축공사 전경
이산서원 이건 건축공사.
권진한 기자
권진한 기자 jinhan@kyongbuk.com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