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두부가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색이 쓴 ‘목은집’의 ‘대사구두부래향(大舍求豆腐來餉)’이라는 시에 ‘두부’ 명칭이 처음 나온다. 이것으로 봐서 고려 말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원나라에서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부는 조선시대 문헌에 ‘연포(軟泡)’라 기록돼 있다. ‘연두부’인 셈이다. 당시 두부는 특별한 음식으로 각종 제사와 잔치에 쓰는 것을 ‘조포사(造泡寺)’라 지정한 절에서 공급 받았을 정도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산 좋고 물 좋은 절에 가서 두부 요리를 먹는 ‘연포회(軟泡會)’라는 모임이 있었다. 연포회 식탁의 메인 요리는 ‘연포탕(軟泡湯)’이었다.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두부를 누르지 않으면 연하게 된다. 이것을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는다. 흰 새우젓국과 물을 타서 그릇에 끓이되,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빠지게 한다. 그 속에 두부 꼬치를 거꾸로 담가 끓여서 조금 익었을 때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잘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으면 매우 부드럽고 맛이 좋다.”고 했다.

연포탕은 홍만선의 레시피대로만 만들어 지지 않았다. 살찐 암탉으로 국물을 내거나, 쇠고기 큰 것 한 덩어리를 넣어야 국물의 맛이 좋다거나 하는 기록도 있다. 또 조선 중기까지는 연두부를 사용했지만 18세기에 와서 굳힌 경두부를 사용하는 것으로 취향이 바뀌었다. 19세기 정약용은 시에서 닭고기와 단단한 두부, 그리고 각종 버섯과 후추를 연포국 재료로 사용한 것으로 묘사했다. 지금은 두부가 아닌 낙지나 문어를 넣고 끓인 탕을 ‘연포탕’이라 부르고 있다.

16세기의 ‘연포회’는 홍만선 레시피로 담백한 소식(素食)을 먹는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과 시를 논하던 워크숍이었다. 이후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선비들의 연포회가 연포탕의 맛처럼 변해 파벌과 세력화 모임으로 변질됐다. 파벌의 주동자들이 연포탕에 닭고기는 물론 평소 불법이었던 쇠고기까지 넣어 끓이게 한 것이다. 마침내 1754년, 사찰의 연포회 폐단에 대해 영조가 신하들과 논의 끝에 금지령을 내렸다. 이 같은 조선시대 양반의 식도락, 두부와 연포회에 대해 한국국학진흥원이 인터넷 잡지 웹진 ‘담’에 자세하게 소개해 눈길을 끈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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