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인간 세상에서 재판을 할 때 주관성을 버리겠다는 뜻으로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있다. 오른손엔 천칭, 왼손엔 법전이나 칼을 쥐고 있다. 천칭은 하나의 주장과 그 반대 되는 주장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무게를 달기 위해서다. 또 법전이나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치우친 주장을 하는 자를 벌주기 위해서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힘의 원천인 법전이나 단호함을 나타내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정의의 여신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중앙 현관에도 있다. 이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에 천칭을 높이 들고, 왼손으로 법전을 감싸 쥐고 있다. 원래 정의의 여신이 선 자세로 눈을 가리고 있지만 이 한복 입은 여신은 앉아서 눈을 뜨고 있다. 이 눈뜬 정의의 여신에 대해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상을 “눈을 떴으니 완벽한 공평을 기대할 수 없고, 법률만 읊조리는 책상물림 법관의 모습으로 철학적 빈곤에서 나온 상”이라고 한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다른 쪽에서는 “눈을 떠서 당사자의 사정을 잘 살피고, 저울을 달아 형평성을 판단해 보다가 그래도 부족하면 법전을 펼쳐 정확한 판결을 내린다”는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다.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이 탁월한 해석은 “당사자의 신분과 지위를 확인해서 봐줄 사람인가 아닌가를 식별한 후 형식적으로 저울에 올려보는 척하다가 손에 든 장부를 보고 내게 무슨 이득인가를 따져 심판한다”는 것으로 다르게 풀이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재판부가 후자의 해석에 더 가까운 행태를 보여서 대법원 앞의 여신상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우리 법원의 가슴 아픈 현실이다.

법 적용의 형평성은 그 무엇보다 지엄하다. 더불어민주당이 19일 국회에서 김경수 경남지사 1심 판결의 법리적 문제점을 제기하는 간담회를 열었다. 집권당이 판결이 부당하다며 여론전에 나섰다. 사법부 독립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법질서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누구나 판결에 대한 불만은 얘기할 수 있지만 여론재판이 돼서는 안 된다. 봐줄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대법원 정의의 여신의 눈을 가리고, 손에는 단호한 칼을 쥐어 줘야 한다. 그래야 법이 바로 선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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