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신앙·애국심 굳건해지신 듯"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원영 목사의 딸 이정순(86·오른쪽) 씨와 이정옥(84·왼쪽) 씨.
“일본 순사가 산길을 오르며 냈던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정말 무섭고 두려운 밤이었습니다”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원영(1886년 7월 3일∼1958년 6월 21일) 목사의 두 딸, 이정순(87) 씨와 이정옥(85) 씨는 과거 일본 순사가 아버지를 잡으러 왔던 기억을 떨쳐내지 못했다.

언니 정순 씨는 먼저 “아버지가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거사 때도 선두에 서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고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일본군 수비대에 가장 먼저 체포됐다”며 만세운동부터 해방까지 가족들이 겪었던 과정을 차례로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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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유로 징역을 선고받은 당시 34세의 이원영 목사 수감 사진.

이 목사는 1919년 3월 17일 안동 예안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앞서 면사무소 등사판(인쇄기 한 종류)을 이용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하고 만세운동계획을 인근 지역으로 알렸다. 거사 당일에는 30여 명을 이끌고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높이 들면서 장터를 향해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된 이 목사는 같은 해 4월 24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그곳에서 함께 수용됐던 유림출신 이상동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됐고 뜻이 같은 이들을 통해 한층 성숙해졌다. 이를 두고 정순 씨는 아버지의 모든 생활이 바뀐 계기라고 밝혔다.

그녀는 “당시 3·1 만세운동을 이끈 인물들은 종교계 사람이 유난히 많았고 모두 지식인,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었다”며 “아버지는 공부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뜻이 같은 것을 알게 되면서 애국심과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이 목사는 집안에서 배척받았다.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시련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생활터전 곳곳에서 압박을 받았다. 결국, 일본의 시야를 피해 산속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계속 감시했던 일본 순사들이 이 목사를 끌고 가기 위해 계속 찾아왔다. 가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동생 정옥 씨는 “아직도 일본 순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선하다”며 “검은 신발을 신고 집안에 들어와 아버지를 포승줄에 묶은 후 끌고 갔다”고 기억을 꺼냈다.

또 “아버지를 면회하려고 가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코에 고춧가루를 넣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며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기까지 했었는데, 가족들에게는 아픈 기억이다”고 말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과도 끝없이 싸웠다. 산속에 있는 쑥과 냉이를 삶아 죽으로 만들어 온 가족이 나눠 먹었다.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속살을 끓여 먹기도 했다. 힘들었던 기억에도 정옥 씨는 “오히려 채식했던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웃음을 지었다.
이원영 목사 회갑 당시 가족 사진.
두 딸은 해방 전까지 아버지에게 들었던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말을 80년이 넘도록 기억하고 있다. 신사참배를 피해 산속에 있었을 당시 정순 씨와 정옥 씨는 호롱불 밑에서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동생 정옥 씨는 “옛날에는 딸이 시집갈 때 혼수를 많이 해갔었고 출가한 개념이 컸다”며 “아버지는 가져간 재산은 다 빼앗길 수 있지만, 절대 뺏을 수 없는 지식을 꼭 머리에 넣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고 회상했다.

이 목사의 자식은 딸 6명과 아들 1명으로 총 7남매지만, 딸 중에서 공부한 것은 다섯째 정순 씨와 막내딸 정옥 씨뿐이다.

정옥 씨는 “일본군이 처녀공출이라고 하면서 마을 처녀들을 다 군으로 끌고 갔는데, 그게 지금의 위안부다”며 “처녀공출 대상이었던 언니들은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찍이 결혼을 해버렸다”며 “어렸던 우리는 그 후에 아버지로부터 국어와 수학, 한문을 배웠다”고 털어놨다.

두 딸은 해방 후 1946년부터 학교에 다녔지만, 배울 것이 없었다. 아버지와 공부했던 덕분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옥 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를 배우고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한글을 다시 가르치는데, 언니와 나는 한글을 다 읽고 쓰는 상태였다”며 “당시 언니가 초등학교 5학년이고 내가 3학년이었는데 중학교로 월반했다”고 웃음을 지었다.
이원영 목사 사진과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국가유공자증.
이 목사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됐다. 두 딸은 고인이 된 아버지 뒤를 이어 광복회 수성구지회에서 활동하면서 이 목사에 대한 기록들을 수집 중이다. 집안 곳곳에는 독립유공자 훈장증을 비롯해 아버지에 대한 자료들로 가득했다. 모은 자료들은 안동시 문화유산 제49호인 이원영 목사 생가에 전시하는 등 기부할 계획이다.

정순·정옥 씨는 “해방 당시 옥에서 풀린 아버지가 비쩍 마른 모습으로 오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기억이 난다”며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도 함께 만세를 외치며 벅찬 가슴을 부여잡았었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우리 후세들이 나라의 역사를 잘 알고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버지의 자료들을 남길 예정이다”며 “3·1 운동과 일제강점기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다”고 강조했다.

전재용 기자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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