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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동학 사)혜명학술원 원장
정부가 ‘3·1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유관순 열사의 훈격을 ‘독립장’(3등급)에서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높여 서훈한 건국훈장이 주목받고 있다. 현재까지 전체 독립유공자는 1만5511명이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한민국장 32명, 대통령장 92명, 독립장 821명, 애국장 4323명, 애족장 5699명 등 총 1만967명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은 인물은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개국공신과 유사한 건국에 공헌한 1등 공신이라 볼 수 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은 인물들의 시대별 활동상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 일본의 본격적인 한반도 진출이 시작되어 약 35년 만인 1910년 8월의 경술국치에 의해 일본강점기에 들어갔다. 독립유공자의 운동계열별 현황은 2638명(17.01%)이 서훈된 의병활동이 선두주자였다. 의병의 본격화는 1895년 을미의병이다. 면암 최익현(1834~1907), 왕산 허위(1854~1908)와 운강 이강년(1858~1908)이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은 의병 인물이다. 허위는 경북 구미시 출신으로 허위의 맏형 방산 허훈은 청송 진보의진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 성산 허겸은 형과 아우를 도와 의병 투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허겸·허학·허필은 그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운강 이강년(1858~1908)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유인석의 제자로 을미의병과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발생한 정미의병에서 맹활약하였다.

송재 서재필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과 조병세가 순절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 고종 밀사로 파견된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1909년 10월 26일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안중근 의사(1879년~1910년)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사건이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라오닝성 다롄시 뤼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필자도 며칠 전에 하얼빈을 방문하여 영웅 안중근의 기상을 느끼고 왔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 대표 손병희, 기독교 대표 이승훈, 불교대표 한용운이 대한민국장을 서훈되고 나머지 대표는 독립장을 서훈 받은 길선주를 제외하고 대통령장을 모두 서훈 받았다. 최린, 박희도, 정춘수는 변절했다. 유관순 열사도 3·1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이번에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았다.

3·1 운동 이후에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사이토가 조선 총독으로 왔을 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 길림성지부장인 강우규(1855~1920)는 1919년 9월 사이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의거의 주인공이었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4월 11일 설립되었다. 초대대통령 이승만, 이시영, 안창호, 신익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김구, 여운형 등은 임시정부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특히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신이다.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의 1932년 상해의거로 인하여 중국인들이 감동했다. 쑨원, 장제스, 쑹메이링, 천궈푸, 천치메이 등이 중국인으로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았다.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 장군과 1925년 정의부의 오동진은 만주에서 활약했고, 국내의 조만식과 미주에서 활약한 임병직도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았다.

친일청산도 중요하지만 독립유공자 선정의 공정성과 후손들의 예우와 대우가 민족정기와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독립장을 서훈 받은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서훈 승격문제도 고려해보아야 할 사항이다.

류동학 사)혜명학술원 원장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인터넷경북일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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