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독립 결의한 학승들의 잊혀진 이름…모두가 기억하길

▲ 보현사 심담(53) 스님.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kr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화사 학승들의 공적을 100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기리게 됐습니다”

대구 중구 남산동에 있는 보현사는 100년 전 동화사 학승들이 3·1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10명의 학승은 이곳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 이들의 주도로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어졌으나 현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학승은 10명 중 3명뿐이다.

독립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학승들의 포상을 신청할 계획인 보현사 심담(53)스님은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학승들의 만세운동을 전하며 공적이 기록되길 바라는 간절한 속내를 내비쳤다.
1919년 4월 3일 매일신보에 기록된 동화사 학승들의 3·1 운동관련 기사 사본. 당시 대구 덕산정포교소 승려 10명이 만세운동을 주도해 검거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kr
동화사 학승들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동화사 학승들은 중앙학림 선배인 윤학조(당시 25세)를 만난다. 윤학조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된 불교계의 만세운동을 전해 들은 동화사 학승들은 대구에서 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만세운동을 결의한 그들의 나이는 당시 19∼23세였다.

청년 학승들이 처음으로 논의한 만세운동 장소는 동화사 길목의 백안장터였지만, 대규모 만세운동을 위해 덕산정시장(현 염매시장)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거사 전날 학승들은 보현사 포교당에 모여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고 3월 30일 오후 2시 학승들이 외친 ‘대한 독립만세’ 소리가 덕산정시장에 울려 퍼졌다. 미리 만든 태극기는 장대 끝에서 펄럭였고 시장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심담 스님이 학승들의 3·1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보현사 외벽에 새겨질 벽화와 담장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kr
학승들이 주도한 열띤 만세운동은 현장에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제지됐다. 2000여 명의 군중이 해산됐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승 10명은 체포됐다. 학승들은 같은 해 4월 15일부터 5월 12일까지 차례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심담 스님은 학승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만세운동을 조사하고 자료를 모으면서 ‘과연 나라면 만세운동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고 확신하지 못했다”며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을 일으킨 학승들의 용기는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반면 만세운동을 벌인 동화사 학승 모두가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상태라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구 중구 남산동에 있는 보현사 전경. 100년 전 동화사 학승들이 거사 전날 이곳에 모여 3·1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만들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kr
그는 “보현사로 오면서 인근에 학승들의 만세운동을 기록한 작은 조형물을 발견했지만, 자세한 기록은 없었다”며 “학승들의 만세운동 자취를 쫓아 자료를 수집해보니 7명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청년 학승들은 중앙학림 윤학조와 동화사 학림 이성근, 김문옥, 이보식, 김종만, 박창호, 김윤섭, 허선일, 이기윤, 권청학 등 10명이다.

그러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김문옥(1990년), 이기윤(1992년), 권청학(2007년) 3명뿐이다.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7명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대구 중구 남산동 보현사 외벽에 걸린 동화사 학승들의 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 시안.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kr
심담 스님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3명의 학승이 자손들에 의해 추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스님들을 강제로 결혼시키는 등 한국 불교계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일부 학승들은 불교를 떠나 자손을 낳았고 그들의 신청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추측이다.

그는 “결혼을 해야 주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등 일본이 결혼할 수 있는 자신들의 불교문화를 한국 불교계에 전파하려는 일종의 종교 탄압을 벌였다”며 “일제강점기 시절 약 7000명의 스님이 결혼한 것으로 전해지고 700명 정도만 결혼을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승 중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7명은 끝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동화사에서 지난 일 년 동안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할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심담 스님은 학승들의 공적을 인정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있는 기록부터 관련 서적, 당시 학승들에 대한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사본, 일제강점기 시절 매일신보 기사까지 동화사 스님들과 함께 모은 자료들을 나열했다.

그는 “지난 일 년 동안 모은 자료에 당시 매일신보 기사와 대구지방법원 판사의 판결문을 확보했다”며 “자료에 이미 공적을 인정받은 3명의 학승을 비롯해 7명이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증거들이 있어 공적을 인정받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보현사 주변에는 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와 관련 벽화도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보현사 정문 왼쪽 외벽에는 100주년 기념비 시안이 그려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심담 스님은 “지난해 10월에 대구시에 100주년 기념비 건립을 신청했고 올해 예산을 신청해 건립을 추진할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며 “보현사 앞에 세워질 3·1 운동 100주년 기념비에 학승들의 이름과 공적이 새길 것”이라고 밝혔다.

또 보현사 건물 외벽에는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승들의 모습이 벽화로 채워질 전망이다. 중구청에서 남산 하누리 조성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이다.

심담 스님은 “일본의 거센 탄압에 대항한 대구의 3·1 만세운동 중에는 동화사 심검당에서 결의를 다지고 장터로 나선 학승들도 있었다”며 “후손이 없었던 학승들의 공적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두가 기억하고 이곳 보현사가 한 만세운동의 터전이자 성지로 기록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강조했다.

전재용 기자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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