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전 조선이 국태민안을 누린 것은 신숙주 외교의 공이 크다. 신숙주는 변절자로 불렸지만 세조의 치세를 도와 국가 발전에 많은 업적으로 남겼다. 임종을 앞둔 세종은 신숙주를 불러 말했다. “당(唐) 태종에겐 위징이 있었고, 나에겐 그대가 있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세조를 왕위에 올린 일등공신은 한명회이지만 죽음에 임박해서는 창업공신 한명회보다 수성공신 신숙주를 더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현실주의 정치인이고 실용주의 신봉자였던 신숙주는 국제감각이 뛰어난 외교통으로 당시 대외 외교에 지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조선의 주상은 세조였으나 외교 군사에선 신숙주가 주상이었다. 세조는 여진 정벌을 결정하기에 앞서 신숙주를 경복궁 교태전으로 불러들여 의견을 나눈 뒤 최종 결단을 내렸다. 대외관계에선 정권 실세 한명회보다 위상이 더 높았다.

외교 주무부서 예조를 관장하는 예조판서 신숙주는 ‘맞춤형 외교’를 펼쳤다. 최강 명나라에 대해선 사대외교를 고수, 양국 관계를 공고히 다지면서 무역 특혜의 실리를 취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악의 축’ 여진족에겐 채찍과 당근 정책을 구사했다. 조선 변경을 위협하는 여진족에게는 군사적 강공, 조선을 상국으로 받드는 여진족에게는 무역을 통해 경제적 특혜를 베풀었다. 그 결과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184개의 여진족 집단 중 79개가 조선을 받들어 여진족 절반이 명나라와 조선을 동급으로 대했다.

왜구의 진원지인 대마도에 대해선 경제적 회유책을 써 왜구들의 한반도 침공을 잠잠하게 했다. 외교사절로 명나라와 일본을 수 차례 드나들면서 외교적 경륜을 쌓은 신숙주가 펴낸 ‘해동제국기’에는 구체적 정보에 기초한 일본 각지의 지도와 상세한 무역 정보가 실려있어 조선 시대 대일외교의 지침서로 활용됐다. 신숙주는 죽기 직전 성종에게 “일본과 화(和)를 잃어서는 안 된다”며 일본과의 전략적 화해정책을 진언했다.

한·일 관계가 사방으로 꽉 막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역할이 보이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무능 외교로 4강 외교의 난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신숙주의 외교 경륜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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