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새 잃은 삶의 터전…"갈 곳이 없다", "내 집 아닌 줄" 막막

5일 오후 강원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속초·고성 산불로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
강원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5일 대피소에서 연이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 이재민들의 얼굴은 근심·걱정으로 미소를 잃었고,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두 번째 밤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이날 저녁 고성 천진초등학교에는 사각형 구호 텐트 약 50개가 빽빽하게 들어찼다.

대피소 바깥에는 기독교 봉사단과 통신사 등 단체들이 이재민들에게 컵라면, 생수, 온수, 간식 등 물품을 지원하는 부스도 차려졌다.

이들은 대부분 집이 잿더미가 돼 오늘 밤 마땅히 묵을 곳을 찾지 못한 이재민들이다. 주로 피해가 심했던 인흥리와 성천리, 용천리에서 온 주민들이다.

이재민들은 서로의 텐트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집이고 축사고 홀라당 다 타버렸다”고 쾌활하게 말하며 애써 웃음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표정에서 드러나는 걱정은 숨기지 못했다.

용천리에서 온 김모(69·여) 씨는 뼈대만 남은 집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3층 다락방까지 다 타버려서 갈 곳이 없다”며 “당장 지낼 곳이 없어 언제까지 이곳(대피소)에서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39년째 봉포리에 터를 잡고 살아온 강종여(76·여) 씨도 하룻밤 새 화마에 정든 집을 잃었다.

강씨는 “산불이 집 뒤쪽까지 갑자기 번져서 불길이 막 치솟았다”며 “옆집 아줌마랑 서로 엉덩이를 받쳐주면서 담을 올라 빠져나왔는데 급히 나오느라 보청기도 못 가져와서 소리가 잘 들리질 않는다”라고 하소연했다.

강씨의 중학생 손녀 역시 불이 난 집에서 할머니가 평소 드시던 혈압약을 챙겨 나오려 했지만 이미 번질 대로 번진 매캐한 연기 때문에 급히 되돌아 나왔다고 했다.

강씨는 “불 다 끄고 누가 우리 집 사진을 찍어왔는데 보고서는 내 집이 아닌 줄 알았다”며 “1980년에 지어서 여태 살아온 내 집을 몰라볼 만큼 흉물이 됐다”고 가슴을 쳤다.

1996년 고성 산불 등 그동안 대형산불을 수차례 겪은 주민들은 산불에 이골이 났으면서도 그 위력에 대해서는 큰 두려움을 표했다.

인흥에서 온 윤모(74) 씨는 “불이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몰아치는 그 모습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며“ 이번에도 불꽃이 보이자마자 그때 기억이 떠올라 집에 살던 개 2마리만 데리고 정신없이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는 정말 도깨비불처럼 불꽃들이 날아다녀 공포 정도가 더 심했던 것 같다”며 “산불에 많이 당하다 보니 사람들이 의연해 보이긴 하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피소인 용촌2리 마을회관도 분위기가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산불에 집을 잃어 갈 곳이 없는 주민 10여명이 삼삼오오 모여 지친 표정으로 둘러앉아 당시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5일 오전 전날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서 시작된 산불이 번진 강원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마을에 한 주택이 불에 타 검게 그을려 있다. 연합
김정연(47) 씨는 “어젯밤에 아무것도 못 챙기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대피해서 추운 밤에 입을 옷도 없다”며 “당분간은 마을회관에 있다가 안 탄 이웃집에 가서 신세를 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집에서 키우던 소 3마리가 모두 죽었다는 함영순(75) 씨는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연신 소주만 들이켰다.

키우던 소 6마리 중 5마리가 죽고 1마리가 연기를 들이마셔 위독한 상태라는 김명만(58) 씨는 말없이 바닥만을 응시했다.

종일 마을 주민들과 주변 피해 상황을 알아본 이장 이제은(72) 씨는 “불에 타지 않은 집 중에서도 화재 때문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 가구가 많다”며 “한전에서 빨리 전력이 끊긴 가구를 파악해 복구해줬으면 주민들의 불편도 적어질 것 같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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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kb@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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