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염(血染) 태극기가 있다. 조선시대 사헌부 감찰을 지낸 황만수가 1890년대 국권 사수를 위해 손가락의 피로 그린 태극기다. 인천시립박물관협회가 지난달 11일 공개한 이 태극기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천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고, 피로 양의 부분을 크게 강조하듯이 그려 넣었다. 의로운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대한민국 역사의 산 증거품이다.

대한광복군의 서명 태극기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조국을 위하여 피를 흘리자’,‘완전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 ‘열열한 혁명의 투사가 되어라’ 태극문양과 4괘가 선명한 태극기에 빼곡히 적힌 독립운동가들의 다짐이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 대원 70여 명이 직접 다짐을 써 넣은 이 태극기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6월 항쟁의 상징이 된 태극기도 뇌리에 선명하다. 1987년 6월 26일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국민평화 대행진의 날’ 행사를 열었다. 이날 부산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부산 문현로터리 시위 도중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자 태극기를 펼쳐 든 한 청년이 웃통을 벗고 “최루탄 쏘지 마라”는 외침과 함께 경찰 쪽으로 달려가는 사진 속 태극기도 가슴을 뛰게 했다.

태극기는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상징이었고,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3·1운동 당시 일제는 태극기를 만들거나 지니고 다니기만 해도 독립운동으로 간주했다. 4·19혁명과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때도 태극기는 국가 권력에 맞서는 국민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이런 태극기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순방을 위해 탑승한 전용기의 태극기가 거꾸로 결렸다가 이륙 직전에야 바로 걸었다. 지난 4일 외교부에서 열린 한-스페인 차관급 회담장엔 구겨진 태극기가 걸려 국민의 마음을 주름지게 했다. 지난 10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문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의장대가 빛 바랜 태극기를 사용했다.

태극기 수난사가 끝이 없다. 국기(國旗)는 민족과 국가의 상징이자 존엄이다. 최근 연이은 태극기 수모와 대통령 의전의 실책들은 뒤집힌 대한민국 국가 조직의 현 수준을 말해준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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