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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국 고문헌연구소 경고재 대표·언론인
지난 12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우리 정부를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거친 표현으로 비난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쓰기 힘든 말을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놓고 한 것이다. 이 발언은 우리 국민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과 정부는 김정은의 이 발언이 있은 지 3일이 지나도록 침묵으로 일관하고 지난 15일 열린 청와대 회의에서도 ‘오지랖’ 운운에 대한 김정은의 이 발언에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김정은의 이 발언으로 문 대통령의 ‘중재자론’은 미국과 북한 양쪽으로부터 사실상 퇴짜를 맞은 셈이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중재자’ 표현을 빼고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 강화 등 한반도 평화 질서를 만드는데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으며 앞으로도 한반도 평화 질서를 위해 필요한 일을 마다치 않겠다”고 했다. 김정은이 요구한 ‘중재자’를 빼고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웠다.

지난 ‘하노이 노딜’ 이후 백악관뿐만 아니라 미국 조야에서도 한국 정부가 한미동맹 대신 북한 편을 든다는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번 김정은의 ‘오지랖’ 운운하는 발언에 대해선 단호하게 우리 정부가 짚고 가야 했었다. 그래야만 김정은이 우리 정부를 향해 북한 편을 들라고 공개적으로 ‘오지랖’ 발언을 한 것에 대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우리 정부에 대한 불신을 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조야의 이런 입장 표현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분명하게 보여 졌다. 지난 11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일대일 독대 시간이 불과 2분밖에 되지 않았다는 미국언론들의 보도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단독회담은 29분간 열렸으나 두 정상의 모두 발언과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으로 두 사람이 독대한 시간은 2분밖에 안 됐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선임보좌관은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언가 재촉할 기회를 미측이 주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 비공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지 않도록 배려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핵의 해법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빅 딜’과 ‘스몰 딜’이라는 ‘동맹이몽’의 큰 간격 차이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청와대 회의에서 “이제 남북 정상회담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할 시점”이라며 4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북한의 형편이 되는 대로 장소와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남북이 마주 앉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넘어서는 진전된 결실을 보는 방안에 대해 논의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장담해 왔으나 이번 김정은의 ‘오지랖’ 발언으로 김정은의 방한은 사실상 어렵게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변함없는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고도 했다. 김정은의 지난 12일 시정연설에는 그런 대목이 어디에도 없다. 비핵화라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김정은은 “근본 이익과 관련한 문제에선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3차 북·미정상회담을 한번 더 해볼 의향은 있다”면서도 “하노이 회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도 했다. 김정은의 시정연설에는 어디에도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볼 수가 없다. 도대체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무엇을 높게 평가한다고 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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