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브스리를 꿈꾼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지난 2005년 출간해 화제를 모았던 책 제목이다.

`서브스리(Sub Three)'란 마라톤 풀코스 42.195㎞를 3시간 내 완주하는 것을 일컫는 말. 대부분 마라토너들의 꿈이기도 하다.

올해 초 대권도전을 선언하며 그는 "꼭 완주하겠다.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라며 다시 마라톤을 화두로 꺼내들었다. 정치의 `서브스리'에도 성공하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사실 그에게 마라톤이 각별한 이유는 기형적으로 위를 향하고 있는 2개의 발가락 때문이다.

그는 1964년 제주도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거의 잘릴뻔한 사고를 당하고도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해 발가락 두개가 위를 향해 뒤틀리는 기형이 돼 버렸고, 이로 인해 군대도 면제받았다.

장애를 극복하고 마라톤에 도전했던 것과 같이,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도전정신이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화두라고 측근들은 전한다.

원 의원을 수식하는 수사는 `학력고사 전국수석', `서울대 수석입학', `사법고시 수석' 등 화려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는 빼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초등학교 시절에는 서점을 하다 망한 부모님이 집안에 들여놓은 각종 책에 둘러싸여 독서에 열중하는 편이었다.

그의 지인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눈에 띄게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특히 고3이 된 이후에는 전국수석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고2까지만 해도 제주도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남폿불에 의지, 사과상자를 책상 삼아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1982년 서울대 법대 입학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는 "대학에 들어와서 충격이 컸고 혼란스러웠다"며 "서울은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봉천동 산동네에 와보니 제주도와는 비교할 수 없게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대학입학 후 첫 몇달간 집과 도서관을 왕복하던 그는 82년 5월27일 서울대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린 집회를 보고 80년대 대학가를 지배했던 학생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심한다.

그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친구들이 시위하다가 흩어져 도망가던 중 장미 가시에 찔려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며 "그게 박혀서 평생을 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후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에 들어갔고, 시위로 경찰서에 끌려가 6개월간 유기정학을 받았다. 또 구로공단에서 야학생활을 하기도 했고, 인천에 있는 한 금속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그는 향우회에서 동갑내기 부인 강윤형씨를 만났다. 당시 서울대 의대에 재학중이었던 강씨와는 이후 학생운동을 함께하는 친구로 남아있다가, 10년이 넘는 사귐 끝에 뒤늦게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부인 강씨의 제안에 따른 것.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존댓말을 쓰자는 취지의 제안이었고, 이 약속은 꾸준히 지켜지고 있다.

그의 운동권 경력은 1989년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끝이났다. 방황끝에 그는 사법고시 준비를 결심했으며, 시험준비 2년만인 92년 수석으로 합격했다.

당시 그가 시험을 준비하며 정리한 `원희룡 노트'는 `족집게 노트'라는 평가와 함께 후배들의 손에 손을 타고 아직도 전해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서울지검과 수원지검, 부산지검 등에서의 4년여 검사생활과 2년여 변호사 생활을 거쳐 그는 2000년 16대 총선 직전 당시 거센 `젊은피' 수혈 바람을 타고 곧바로 정계에 입문한다.

정계 입문에는 이미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김민석 전 의원과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 등 학생운동 당시 선.후배들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그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러브콜'에 응해 양천갑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과 관련 "보수개혁"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본인의 정체성을 `보수주의자'로 설정하면서도, 기존 보수세력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내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등 우파적 국가경영방법만을 새롭게 차용하겠다는 뜻인 셈이다.

실제 정계입문 직후 그는 김부겸, 김영춘 등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과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를 만들어 당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17대 총선 직전 탄핵역풍에 직면해서는 이른바 `구당모임'을 결성해 지도부 사퇴 등을 요구하며 정풍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등 굵직굵직한 현안이 터질때마다 그는 늘 당내 `주류' 세력과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이 과정에서 `탈당 1순위', `열린우리당의 간첩' 등 당 안팎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고, 공공연한 `당내 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7대 총선 이후에는 당내 `비주류'에서 `주류'로의 이동을 위한 시도가 한층 과감해졌다.

미래연대 해체 이후 새로 결성한 소장파 의원모임 `새정치 수요모임' 대표 성격으로 2004년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 박근혜 전 대표 다음의 득표율을 올리며 `최연소 최고위원' 자리를 거머쥐며 지도부에 입성했다.

지난 2006년 최고위원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에는 양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 전 대표,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3강 구도'로는 정권교체의 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며 곧장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경선 출마를 공식화한 이후 상황이 여의치 만은 않다.

출마선언 이후 그는 사석에서 여러차례 "소수파로서 한계를 절감한다"면서 "그래도 끝까지 갈 것"이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단일 대오를 형성하기 보다 이 전 시장 지지를 택한 소장파 동료 의원들을 향한 서운함도 내비쳤다.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으로 사춘기에 갓 접어든 두 딸들의 "아빠 정말 출마하는거 아니지. `차차기'를 노리고 하는 거 맞지"라는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주력중이라는 말은 이미 강연의 단골 소재가 됐다.

그의 측근은 "출마를 결정하기 전까지는 고민이 많았지만, 지금은 외로움도 모를 정도로 싸움에 임하고 있다"며 "경선 슬로건인 `당당한 대한민국 함께 잘사는 사회'를 실현하고, 말 그대로 서민과 중산층을 향한 낮은 곳으로 향하는 정치를 하기 위한 발걸음은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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