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업가 수산나 여사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명문가 출신으로 한국에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는 수산나 메리 영거 여사.

소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가끔 익살스런 표정도 지었다. 함께 걸을 때면 보는 사람이 저절로 기분이 좋을만큼 발걸음이 가볍다. 하얀 모시한복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말을 붙이자 다정스럽게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준다.

소녀의 머리는 새하얗다. 소녀는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로 74세. 스코틀랜드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소녀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된장찌개'다.

흰머리 소녀는 '양수지 할머니', '양수산나 여사'로 통한다. 수산나 메리 영거(Susannah Mary Younger)가 원래 이름이다.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로 건너와 대구에 머문지 50년이 넘었다.

수산나 여사가 1960년대에 가톨릭기술학원에서 원생들에게 양재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사진 가운데). 수산나 여사는 이 곳에서 원생들과 먹고 자며 함께 생활했다.

"수지는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애칭이예요. 한국에서도 부르기 쉽고 또 친근감있는 이름이라 수지를 계속 썼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처음에 '스시(초밥)'라고 하더라구요"

소녀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영국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사촌과 삼촌들은 군인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후 운명처럼 외국으로 공부 온 한국인 신부와 만났다. 1959년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와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초청으로 한국행에 올랐다.

"가족들에게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삼촌의 첫 마디는 '한국은 아름답지만 너무 추워!'였어요(웃음). 영국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를 접했고, 갖은 억압과 순교 등으로 뿌리를 내린 교회의 역사에 감동했어요. 초청해 준 효성여자대학에 피아노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에 피아노 7대를 마련해 한달 넘게 배를 타고 왔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긴 여행이었습니다"

지난해 엑스코에서 열린 '청소년박람회'에서 수산나 여사가 네일아트를 받은 뒤 재미있는 손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는 5주 동안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오스트리아 출신인 하마리아 여사도 이 때 한국에 들어왔다. 하마리아 여사는 한국SOS어린이마을 초대원장이다.

수산나 여사는 거기서 전쟁 직후의 한국의 참상을 봤다고 했다. 가족과 헤어져 거리로 나온 아이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서 사는 가족들. 수산나 여사는 '한국에 오기를 잘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수산나 여사는 1960년부터 1965년까지 5년 동안 대구효성여대에서 영어교수로 재직했고 경북대와 대구대에서는 영어강사로 일했다. 틈틈히 대구가톨릭근로소년원의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며 길거리의 구두닦이 소년들을 도왔고, 하양 '무학농장'을 통해 농민들을 도왔다. 당시 경북도지사의 부탁으로 가톨릭여자기술학원(현 가톨릭푸름터)을 운영했다. 대구지역 여성복지의 '선구자'로 불린다.

가톨릭여자기술학원은 생활이 어려운 10~30대 여성들에게 양재, 미용 등의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다. 보호가 필요한 이들 여성들과 함께 먹고, 자며 자립의 희망을 심어주는 곳이었다. 수산나 여사는 일주일의 반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나머지 반은 기술학원에서 여성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기술원 운영이 어려울 때는 거리로 직접 나와 '구걸(?)'도 했다. 자신들의 생활도 빠듯했지만 대구시민들은 그녀에게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보냈다. 이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수산나 여사는 1967년 영국의 출판사를 통해 '무궁화'(Never ending flower)라는 책을 출간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렸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었던 경험담이 책의 주 내용이다. 이 책에서 전쟁직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던 땅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을 하는 모습에 그는 '한국인의 저력'을 봤다고 했다.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한국인은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더라구요"

그녀는 1973년부터 2004년까지 프랑스 루르드 '옥실리움(Auxilium) 문화양성센터'에서 세계 여성지도자 교육을 맡았다. 프랑스에 가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한국을 찾았다. 한 해 1~2개월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문화양성센터 은퇴 후 그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 또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그에게 한국, 특히 대구는 '제2의 고향'이다. 최근 정부로부터 영주권도 얻었다.

"저에게 있어 영국은 '친정집'이고 한국은 '시집', 프랑스는 '직장'입니다. 영국에는 나의 핏줄들이 있고, 한국에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인연을 맺은 또 다른 가족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내집이 있으니깐요. 프랑스에서는 저에게 꼬박꼬박 연금을 주니깐 직장이나 다름이 없지요"

그는 가톨릭푸름터의 고문으로, 소일거리로 주변의 한국사람들을 가르치는 영어강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수산나 여사의 한국 입국 50주년을 기념해 '감사미사'를 마련했다.

수산나 여사는 '수녀'처럼 한 평생을 홀로 지내고 있다. 그에게 '후회'한 적은 없냐고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NO)'라는 답변이 왔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수도자들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다 열심히 전하기 위해서지요. 한국행을 결심한 것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전에 영국에 가면 '한국을 도와주세요'가 입버릇처럼 붙어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아프리카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만큼 한국이 발전했지요. 예전 한국의 10대 여성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10대 아이들은 다른 이유로 일찌감치 돈을 벌려고 하더군요. 안타까워요. 이들에게 보다 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라며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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