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정환 전 대구한의대 총장

지난 6월 30일 대구한의대 총장직에서 퇴임한 후 최근 한의원을 개원한 변정환 전 총장.

"60대부터는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 한다", "대구에 한의대를 설립하기 위해 먼저 영남대를 찾아갔다", "동의보감도 부족하고 잘못 기술된 것이 많다"

변정환(79) 전 대구한의대 총장의 입에서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지난 6월 30일 대구한의대 총장을 퇴임한 후 최근 대구시 중구 봉산동에 한의원을 열었다. '총장'에서 '원장'으로 바뀌면서 이전보다 많은 '자유시간'이 선물로 주어졌다.

변정환 원장이 직접 환자에게 침을 시술하고 있다.

1932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그가 한의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한의사였던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한문과 함께 한의학을 전수했다. 당연히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한의대였던 동양의약대(나중에 경희대로 병합)로 진학했다. 1959년 졸업하던 해 연말 대구 중구의 봉산동에 한의원을 개원하기 위해 간판을 다는데 사람들이 구경을 했다. 그때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길을 가던 14세 정도의 소녀가 쓰러지더니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동이 났지요. 곧 침을 가져가 놓았습니다. 소녀는 금방 일어나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봤습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소문은 무섭게 퍼졌다.

변정환 원장은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내년쯤 3개 국어로 된 '21세기 동의보감'을 낼 예정이다. 이를 위해 일기도 영어로 쓰고 있다.

"다음날부터 사람들이 몰려 오는데 감당을 못했습니다. 새벽부터 수십명씩 줄을 섭니다. 주위에 여관이 7개나 생겼지요. 워낙 많은 손님들이 몰려오니 한의원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주위 집을 매입하려 시가의 3~4배를 주겠다고 해도 땅 주인들은 훨씬 높은 금액을 요구해 결국 변두리인 수성구 상동의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1969년 세계 최초의 종합한방병원인 '제한한방병원'을 설립했습니다."

그 해에 그는 경북한의사회 회장에 당선됐다. 당시 경북한의사회의 숙원 사업이 대구에 한의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회장인 그가 나섰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영남대. 이효상 재단이사장과 이선근 총장을 만나 한의대 설립을 제안했다. 영남대는 오랜 시간 이를 검토했지만 결국 재정이 부족해 설립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다음 찾아간 곳은 대구대였다. 그러나 대구대는 설립자의 유언이 "의대와 공대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북대를 찾았으나 의대 교수들이 강력히 반대해 물거품이 됐다. 이렇게 되자 변 회장은 직접 한의대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래서 1980년 탄생한 것이 대구한의대다. 그가 48세였을 때다.

그는 한국에서 한의학이 푸대접 받는 이유가 일제의 한의학 말살, 서양의학 육성정책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과 일제 때 의병을 일으키거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의병활동과 독립운동 자금도 대부분 이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일제가 이를 알고 한의학 말살에 들어갔습니다. 한·중·일 3국 중 일본에서 동양의학이 가장 뒤떨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제는 평양과 서울, 대구에 의학전문대를 설립했고 이곳에는 친일파의 자식들이 우선 입학했으며 이들이 나중에 한의학을 공격하는 일선에 섰고 그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변 원장은 한의학이 세계적인 의학으로 발돋움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저서 '시련을 딛고 밝은 세계로'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73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제56차 국제라이온스대회에 참석했다. 어느 날 호텔에서 잠을 자는데 인솔책임을 맡고 있는 사무국장이 문을 두드렸다. 일행 중 L씨가 병이 났다는 것이었다. 일행으로 함께 온 의사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의사들은 환자의 병이 신장결석증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사무국장이 혹시나 해서 변 원장을 찾아온 것이었다. 침을 놓으려하자 의사들은 웃었다. 환자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침통을 꺼내 침을 꽂기 시작했다. 곧바로 환자의 비명소리가 사라지고 죽은 듯 잠에 떨어졌다. 다음 날 L씨는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이후 의사들도 그의 방에 와 침을 놔 달라고 했다. 1975년에는 세계침구학술대회로 뉴욕에 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묵고 있는 호텔에 날마다 십여명의 교포들이 찾아왔다. 침술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방에서 치료를 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중에는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줄을 서 호텔측이 항의를 하기도 했다. 방문자 가운데 뉴욕 주재 영사가 있었다. 치료를 받은 뒤 미국으로 오라고 했다. 시민권을 받고 개업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은 여기서 침구시술로, 하루에 100여명씩 몰리는 손님들에게 치료비를 100달러씩 받는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1회 침구시술에 500원을 받던 시절이었다. 변 원장은 "대구에 한의대를 설립해야 하고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며 대신 엄 모군을 추천했다. 엄 씨는 지금 LA에서 큰 부자가 돼 있다.

변 원장은 우리나라에서 '漢醫(한의)'라는 말을 '韓醫(한의)'로 바꾼 것도 자신이라고 밝혔다.

"1980년 4월 1일 한의사협회장에 취임해 '韓醫의 맥박'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후 전국에서 문의가 쇄도했습니다. '漢醫'를 '韓醫'로 잘 못 쓴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韓'은 우리나라, '漢'은 중국을 일컫는다며 '당연이 우리나라의 의학은 韓醫로 해야 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후 '韓醫'가 굳어지게 됐지요."

-지역 한방산업의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대구와 경북이 한방산업에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5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세계에서 4시(계절)가 가장 분명하고, 둘째로 가장 춥고 가장 더워 식물의 약성이 강하게 농축되며, 셋째로 전국에서 맑은 날이 가장 많습니다. 이는 식물의 성장에 가장 유리합니다. 넷째,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의 비옥한 토질은 약초 재배에 가장 적합하고 다섯째, 대구와 경북인들의 약초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는 심성이 가장 우수합니다. 선조가 약령시를 대구에 만든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한방산업은 대구와 경북의 미래산업입니다. 반도체와 섬유 등은 신기술이 개발되면 바로 그것을 능가하는 제품이 개발되지만 한방은 모방과 경쟁이 불가능합니다."

-한의학 발전에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중국 정부는 중의학을 서양의학보다 더 지원합니다. 우리 한의학은 건국이래 지금까지 서자취급을 받았습니다. 친일파 후손들의 정책 주도에 영향 받았기 때문입니다. 의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는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낫지만 정책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세계화에서도 한의학은 중의학에 뒤지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중의학이 한의학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자체도 한방산업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지원 의지도 약합니다. 앞으로는 대구경북한방산업진흥원도 전문가를 영입해야 합니다."

-하루에 한 끼를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10여년전부터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사람은 20살까지는 세 끼를 먹어야 하지만 이 후부터는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두 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60대부터는 한 끼로 충분합니다. 자동차가 4·5단에 이르면 속력은 더 나지만 연료는 덜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소식을 해야 정신이 맑아지고 용기가 생기며 육체도 건강해집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내년 쯤 한글과 한문, 영어로 된 '21세기 동의보감'을 낼 것입니다. '동의보감'은 400년 전의 것입니다. 부족하고 맞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고 보충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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