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하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

정은하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

'…(중략)…고생하던 우리농부 구차하기 짝이없이/너와나의 짝을짓자 우리하고 제작네요/나의말을 들어보소 우리하고 농부들요/우렁차게 놀아보세…'

예천 통명농요의 일부인 '캥마쿵쿵 노세'라는 노래다. 농부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불렀다. 듣기만 해도 정겹고, 그리운 우리의 민요와 아리랑.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 달개소리, 망깨소리, 보리타작소리, 파래소리, 방아소리, 잘개질소리, 어사용(나무 소리), 나물캐면서 부르는 소리, 베틀 소리, 물레소리, 시집살이소리, 그리고 자장가와 아리랑들. 동네마다 있었던 이 소리들은 농삿일이 기계화하고 이를 부르던 농부들이 사라지면서 이제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지역마다 내려오던 아리랑도 마찬가지. 시골 할머니들조차 요즘에는 뽕짝 노래를 즐겨 부른다. 더덩실 어깨춤은 댄스로 바뀌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라지는 민요를 찾아 영남의 구석구석을 20여년 동안 누비며 그 민요를 채록·재현·체계화하고,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민요를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외길 인생을 걷는 사람이 있다.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정은하(54) 회장이다. 이창배, 안비취에게서 사사한 그는 지난 1991년부터 영남 지역 곳곳을 다니며 우리의 민요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작업에 나섰습니까?

"생전에 안비취 선생님께서 제게 '경기민요는 배우는 사람이 많으니 네가 태어난 영남으로 가서 그곳의 민요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1985년 대구에 와 민요연구소를 내 우리 민요 알리기에 나섰고 1991년부터 민요 발굴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대학 교수들도 급속히 사라지는 민요를 채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교수들이 민요를 부를 수는 없잖아요. 이를 그대로 재현하고 전수하는 것은 우리 국악인들의 몫입니다. 안비취 선생님은 그걸 아셨기 때문에 제게 그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아무도 이런 일에 나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 혼자 혹은 제자들과 많이 다녔습니다."

-차도 없이 많이 어려우셨겠습니다.

"고생은 말로 다 못하지요. 교수님들은 연구비가 나왔겠지만 전 제 돈으로 했어요. 버스가 없어 시골에서 대구까지 택시로 온 적도 많습니다(그는 지금도 차가 없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시골에서 소리꾼 찾기가 힘들지만 그를 찾아도 소리를 안 하려고 하고, 겨우 설득해서 소리를 해도 채록 가치가 없는 것들이 많다는 거예요. 소리를 안하시려 할 때는 술도 사 드리고 장구도 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사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이들에게서 들은 소리를 녹음하고 이를 서양식 악보로 만드는 비용도 모두 사비로 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요."

-농요는 들판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랜데 방 안에서 제대로 소리가 나올까요?

"맞습니다. 경남 고성 농요 배울 땐 제자들과 모를 심으며 소릴 따라했지요. 구미 발갱이들 소리는 모 심을 때 거머리가 다리에 붙은 것도 모른 채 농민들과 노래를 불러가며 배웠어요. 예천 통명 농요를 배울 때도 전수관 앞 논에 들어갔고, 베 짜는 노래는 80만원 주고 베틀을 사 베를 짜면서 배웠습니다."

민요 발굴과 전승 과정에서 정 회장이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영천아리랑과 대구아리랑.

"지난 2004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응원단이 응원가로 영천아리랑을 불러 정말 놀랐습니다. 북한에서 잘 알려진 영천아리랑이 정작 영천에서는 명맥을 찾기도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알고보니 일제 때 영천사람들이 중국 흑룡강성과 목단시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에 의해 북한으로 영천아리랑이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경북대 이상규 교수가 북한에서 국어사전을 구해 제게 주셨는데 거기에 '영천아리랑'의 가사가 완벽하게 있더라고요. 나중에 영천 임고면 선원리에 가니까 한 할아버지께서 영천아리랑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어릴 때 동네 머슴들이 부르는 것을 듣고 익혔다더군요."

대구아리랑은 극적으로 발견됐다. 그는 전국 어디서나 아리랑이 발견되고 특히 경북에 아리랑이 많은데 대구아리랑이 없을 수 없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 속에서 그가 2003년부터 생각해 낸 것이 자신이 창작한 대구아리랑과 전국 및 영남의 아리랑을 가지고 아리랑제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이후 매년 사비를 털어가며 이 행사를 열고 있다. 그러다 지난 2007년 '역사적'인 날이 왔다. "제가 운영하는 영남민요 관련 카페를 보고 서울의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최계란이 부른 대구아리랑 음반이 있다는 거예요. 가서 보니 1936년에 밀리온레코드사가 만든 음반이었습니다. 들어보니 정선아리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분명 대구아리랑이었습니다. 이 때가 2007년 5월 30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구아리랑이 있다는 것이 처음 알려졌다.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아/아이롱 고개로 넘어가네/낙동강 기나긴줄 모르는 임아/정일랑 남겨놓고 가실라요/언제나 오실라요 내사랑아/꽃구름 타고서 오실라요/공산에 우는 두견 무삼일로/임그려 썩은 간장 다녹는다'가 바로 대구아리랑의 가사.

이처럼 그가 20여년 동안 영남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숨어있는 민요를 악보로 옮긴 것이 20여곡, 이를 악보로 옮기기 위해 녹음해 놓은 것이 20여곡 정도 된다. 모두 자신의 사재로 했다. 이 중 1990년대 말부터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이 대구 하빈들소리다. 소리를 들어보니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해 집중적으로 소리를 연구했다. 결국 이 민요는 2008년 4월 대구시지정 문화재로 등록됐다.

하빈들소리와 함께 그는 이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예천 통명농요, 경북도 무형문화재인 안동 저전농요, 예천 공처농요, 상주민요, 구미 발갱이들소리, 경산 자인 계정들소리, 대구시 무형문화재인 대구 공산농요와 중요문화재인 경남 고성농요, 경남 무형문화재인 거창삼베일소리 등을 원래의 소리 그대로 전수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문화재에는 각각 보유자가 지정돼 정부의 지원을 받아 후계자 양성에 나서고 있는데 굳이 정 선생께서 또 전수에 나서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득음을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하고 전수하는 데에도 체계가 있어 효율적입니다. 게다가 문화재 보유자들은 자기 것만 하지만 우리는 문화재로 지정된 영남의 소리 10여개를 모두 소화해냅니다."

영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18살때 무작정 서울로 가 KBS의 민요백일장에 나가기 위해 예선을 치렀는데 낙방했다. 어려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심사를 한 안비취(1926~1997) 명창과 최종민 교수에게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최 교수는 그를 '선소리 타령'의 명인인 이창배(1916~1983) 선생에게 직접 데려다 주었다. 그는 뜨게질로 돈을 벌어가며 소리를 배우다 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안비취 명창에게서 소리 배우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지난 1994년 안 명창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증을 받게 됐다.

지난 1985년 처음 대구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대구는 민요의 황무지였으나 그가 '한국민요연구원'을 낸 1990년 이후부터는 상황이 급전했다. 지역 각 대학들에 국악관련 전공들이 잇달아 개설되면서 그는 바빠졌다. '대학 강단에 서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던 꿈이 이뤄졌다. 지금은 석사학위를 받은 제자까지 나왔다. 영남의 소리를 전수하겠다는 한평생의 꿈이 여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영남지역은 전국에서 민요가 제일 많은 곳입니다. 특히 경북은 아리랑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영남 지역의 민요와 아리랑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를 알릴 소리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를 체계화해서 아름다운 영남의 민요를 후손들에게 알리는 데에 온힘을 다할 것입니다. 대구아리랑의 활성화에도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전국에서 아리랑을 가진 도시는 대구밖에 없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급격히 사라지는 민요를 체계화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대부분의 민요가 부르는 사람마다 다르고 읊조리는 식이어서 전혀 체계가 안 잡혀 있습니다. 이와 달리 경기민요 같은 경우는 정형화돼 있어 전수가 잘 이뤄집니다. 우리도 하루빨리 지역의 민요를 악보로 옮기고 녹음하는 등의 일에 나서야 합니다."

정은하 회장 약력

△1956년 영천 출생.

△1976년부터 고 이창배·고 안비취·이춘희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57호 이수.

△1991~2002년 영남민요발표회(6회).

△1994년 초·중등교과서 수록 민요CD 음반 및 해설집 출간(㈜오아시스).

△1994년 중요무형문화재 57호 이수.

△1996부터 대구교육대 음악교육과, 영남대 국악과, 경북예고, 대구교원예술원 경북교원연수원 등 출강.

△2002년 영남민요보존회 결성, 영천아리랑 공연,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2003년부터 매년 대구아리랑제 주관.

△2003년 '대구아리랑' CD음반(㈜신나라뮤직)·TBC대구방송 '영남의 소리를 찿아서' 제작 참여.

△2004년 팔도아리랑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장

△2007년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결성, '영남아리랑'CD음반(㈜신나라뮤직) 제작.

△2007년부터 매년 영남아리랑축제 및 전국아리랑경창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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