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남석 이성조 선생

남석 이성조 선생은 "벼루에 먹물이 마르면 서예인이 아니다"고 했다. 김락현기자 kimrh@kyongbuk.co.kr

남석(南石) 이성조(73)선생을 만났다. 그는 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서단(書壇)에서 가장 이름 나 있는 작가 중 한명이다. 1959년 만20세의 나이에 국선 서예부문에 당선됐다.

지난 1980년 대 예술가로서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자리에서 홀연히 속세를 떠났다. 팔공산자락에 기왓집 한 채 지어놓고 칩거한지 20년이 다 돼 간다. 병원 갈 때 말고는 대구시내나 산 밑을 내려올 일이 없다는 그를 만나러 팔공산을 찾았다. 11월 11일, 팔공산은 울긋불긋 단풍이 절정이었다. 편집자 주

작업실 내부에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남석 선생은 볕이 잘 드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먹물이 번진 것 같은 화선지 여러 장이 놓여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벼루가 있었고, 벼루에는 먹물이 있었다.

"왜 왔어"라고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면서도 눈은 앞에 있는 화선지의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전 8시부터 한 자리에 앉아 비슷한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고 했다. 2시간이 넘게 움직이지도 않고 그림을 그렸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직 없다고 했다.

"그림과 내가 교감을 하고 있어. 교감이 됐을 때 진짜 작품이 나오는 거야.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야"

교감이 없는 것은 작품이라 말할 수 없다. 그것을 전시하는 작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재물을 탐하는 것은 '생활인'이다. 교감을 하기 위해서는 수백번 생각해야 하고, 수천 번 써야 한다. 그래서 벼루에 먹이 마르면 서예가가 아니다. 여기에 인격을 갖춰야 서격이 잘 되니, 진짜 글을 잘쓰려면 세월의 흐름을 어느정도 겪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은 18살 때 붓을 잡았다. 올해로 55년 째, 그는 지금까지 은은한 묵향에 묻혀 수백만 자를 썼다. 그런 힘은 바로 자신이 가졌던 승부욕을 바탕으로 한 열정에서 나온다고 했다.

"모름지기 작가들은 가슴이 열정을 가져야 해. 그 일에 미쳐야 한다는 거지. 이겨야 하는거야. 나 자신과 이기고, 세상(현실)과 이겨야 해. 요즘 많은 생활인들이 작품 몇점 팔아치워 돈 좀 만지고 유명해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다른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전시회를 한다고 작가라고 할 수는 없는거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그는 '남석 이성조는 죽었다'는 메모를 지인에게 전한 뒤, 세상과 등진다며 지난 1985년 팔공산에 집을 지었다. 땅 면적만 6천611㎡(약 2천 평)이며, 2층의 커다란 한옥집이다. 집 앞에는 잔디밭도 펼쳐져 있다. 팔공산에 집을 지은 예술가 1호로서, '팔공예원(집 이름)'은 명소가 될 만큼 잘 지어졌다. 생활인이 아닌 작가를 주장하는 그에게 이런 집을 지을만한 여유가 있었을까?

집이 여유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처자식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 그가 우리나라 대표로 미국에 건너가 작품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108점의 작품을 들고 75일동안 미국의 주요도시를 돌았다.

그리고 1983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보고회전을 통해 '독립선언문 36폭 병풍'과 '보원행원품(화엄경) 60폭 병풍'을 선보였다. 친지의 도움으로 60폭(약 36m)병풍을 서울로 옮겼지만, 다시 가지고 내려오기는 무리였고, 둘 곳도 없었다. '병풍이 연을 만나지 못하면 서울시청 앞에서 불에 태워 부처님께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인연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만났다. '그저 작품활동 잘 할 수 있는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선생의 요청에 당시 4천만 원을 받았다.

"세금떼고 3천600만 원이 손에 들어왔어. 그 돈이 그때는 어마어마한 액수였지. 하지만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집까지 다 지을수가 없었어. 토굴을 파서 살기도 했어.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 곳에 집을 지었지. 그 때는 깊은 산속이었는데, 집 앞으로 도로가 나 버렸어"

20년 가깝게 속세를 떠났던 그는 고희를 맞은 지난 2007년 10월. 33번 째 개인전을 열었다. 십 수년만에 대구를 내려온다는 그의 소식은 지역 서예계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슈가 됐다. 그의 전시회에는 캄보디아의 왕사(王師) 팻봉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등 200여 명의 내빈이 참석했다.

그리고 대구문화예술회관의 모든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이 선보였다.

'묘법연화경(법화경)' 전 7권 28품 전문이 담긴 168폭짜리 병풍을 비롯해 2천여 점의 그의 작품이 소개됐다. 그리고 그와 인연을 맺어 온 500여 명에게 헌정하는 작품도 선보였다.

120m에 달하는 '묘법연화경 병풍'은 6만9천384자가 쓰여 있다. 글자를 쓰며 도를 닦았다. 전시기간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올해 그는 자신의 작업실은 '팔공예원'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갖는다. 선생이 접시나 항아리 등 도자기 위해 쓴 글과 그림을 볼 수 있다. 달마도나 난초, 연꽃 등의 그림작품 108점이 선보인다. '73, 55, 34, 25, 18'. 73년을 살면서 55년을 붓과 지냈고, 공산예원에 들어온 지 25년에, 칩거생활은 18년 째라며 전시회를 소개한다. 숫자는 그의 인생이었다. 자신을 다 내놓는다는 의미로 이번 전시회(이달 30일까지)를 열었다.

"이번 전시회를 끝으로 내 인생의 '1막'이 내릴 것이다. 나는 야인(野人)으로 돌아간다. 붓과 평생을 장난하면서 살아온 나는 이제 다음 삶을 살 것이다"며 "혹시 앞으로 또 전시회를 가진다면, 무상보시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고 했다.

지금은 땅값만 수십억 원에 이르는 예원이지만 그는 훗날 남은 가족들이 지낼 공간이 마련되면 미련없이 이 곳을 사회에 환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화재단을 만들어 서예의 뜻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2층에 올라 커다란 방 전체를 두르고 있는 '묘법연화경'을 구경한 뒤, 예원을 나섰다. 가을바람이 쌀쌀했지만, 선생은 집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누구든지 차 한잔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놀러오라고, 속세 떠난 나는 항상 집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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