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명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정종명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은 위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정직하고 겸손하게, 회원을 섬기는, 낮은 자세를 잃지 않겠습니다."

지난 1월 임기 4년의 제 25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정종명(66) 소설가.

한국문학발전포럼 대표이기도 한 그는 정직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당당하게 한국문협 이사장에 당선됐다.

한국문협은 회원 1만1천여 명이 참여한 거대 문학단체다. 퇴직 공무원도 많고, 법률 전문가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지역구 국회의원과 손발을 맞출 수 있는 180여 개의 지회·지부를 갖추고 있다. 이들 회원들이 지혜와 역량을 결집하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진이 문협 이사장이다.

정 이사장의 고향은 경북 봉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거리가 없는 겨울밤, 마을 사람에게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같은 이야기책을 즐겨 읽어 주었다고 회상한다.

그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어른들이 담배를 말아 피우다 방치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읽고.

그때부터 장차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의 불씨를 가슴 속에 지폈고 고등학교때는 각종 백일장에서 입상 경력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학원'에 작품을 투고해 싣고 여기저기서 배달되는 여학생들의 편지 읽는 재미에 빠져 대학 입시공부는 뒷전이었다. 국어는 수준급이었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 반대데모 주동자로 낙인 찍혀 퇴학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고, 조기방학 중에 쓴 단편소설 '도주(逃走)'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주최한 전국고등학생 문예콩쿨대회에 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처럼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여온 정 이사장은 "문인들이 문사(文士)나 선비란 이름으로 나름의 자긍심은 지니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뜨거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며 무엇이 문제인지 가장 중요한 것만 예를 들어 보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문학작품은 작가(문인)의 혼(魂)을 불어넣는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고도의 '창조적 예술작품'이어야 함에도 '표절'"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표절'이란 의혹을 받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붓을 꺾고 벼루를 향해 이마를 찧는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이 문인의 도리"라 강조한다.

1966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장차 작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다리 밑에 가 보면 거지들이 더러운 거적을 덮고 산다. 작가란 그런 거지들하고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물었다.

그처럼 우려했던 아버지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 그는 많은 작품을 섰고 55년이 지난 지금 1만명이 넘는 대한민국 문인들의 수장이 됐다.

평소 "문인들의 복지나 처우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온 정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원고료를 인상하는 일, 지방 문인들에게 작품 발표 지면을 대폭 할양하고, 장차 전자문학지로 변환해 회원들의 작품 발표 지면을 무제한으로 확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밖에도 한국문협이 해야 할 과제가 참 많다는 그는 소멸 위기에 처한 한국문인협회 60년사를 서둘러 정리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

하지만 정 이사장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 정부보조금이다.

한국문인협회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받는 2011년도 정부 지원금은 거대단체라기에는 낯뜨거울 정도다.

'월간문학'제작비 보조금으로 월 300만원씩 1년 동안 3천600만원, 그리고 한국문학심포지엄 지원금 500만원, 도합 4천100만원이 전부다. 이는 현 정부가 내건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이란 큰 틀의 문화정책 목표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전국 곳곳에 창작의 열정이 불타게'란 슬로건을 내걸었던 정부가 한국문인협회에 지원한 1년 지원액이 고작 4천100만원.

한국문인협회는 이제 이런 하찮은 푼돈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임기 중 반드시 바람직한 모습으로 체질개선을 단행하겠다고 한다.

문인들의 어려움을 일찍부터 체득한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 1971년 졸업했으나 취업은 어려웠다.

낙향은 할 수 없고 재워 주고 먹여 준 김년균 작가의 호의로 그의 자취방에 들어앉아 500장 넘는 중편소설을 썼다. 김년균 작가는 재미도 없는 그의 작품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읽어 주면서 "소설 잘 쓴다. 작가 되겠다"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 해 4월 월간 '스포츠' 취재기자로 입사했다. 그 해 10월에는 김원일 작가가 부장으로 재직한 도서출판 '국민서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4년 6개월간 근무했다. 1975년에는 유익서, 이채형, 황충상 등을 만나 소설습작 토론회도 만들었다. 이들 모두 만년 '신춘문예 낙방생들' .

하지만 이들 모두는 작가로 등단해 현재 문단에서 맹활약중이다.

1978년 '현대문학'에 입사한 정종명 이사장은 그 해 가을에 단편소설 '사자(死者)의 춤'이 '월간문학'신인작품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1980년에는 서동훈(경북일보 논설이사), 이문열, 이외수, 윤후명, 손영목, 유익서, 김원우, 김채원, 유홍종, 표성흠 등과 '작가(作家)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 1집을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이때 덩달아 '좀 쓰는 작가'로 평가를 받으면서 단편소설 '겨울 야화'를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 중 장편소설 '거인'은 MBC 미니시리즈 8부작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가 가장 많은 고료를 받은 작품은 1999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영남일보에 발표한 장편소설 '욕망의 늪'.

이 작품은 IMF 시절인데, 월 300만원의 원고료를 그에게 안겨주었다고 한다.

2005년 9월부터 현재까지 한국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부에서 겸임교수로 출강하면서 호평을 받고있는 정종명 이사장..

"젊은 협회를 만들고 싶다. 문인들의 창작 욕구를 일으키는 활력소가 되겠다"고 했던 그의 말대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앞장서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모든 문인들의 소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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