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山勝地訪春天(도산승지방춘천: 도산 명승지를 봄날 찾아와 보니)/ 憶昔別科多感先(억석별과다감선: 옛날 별과 생각에 여러 느낌이 앞서는 구나)/ 朝廷閣臣題掛日(조정각신제괘일: 조정 규장각 관원이 어제를 내 걸었던 날)/ 嶺南韻士筆揮筵(영남운사필휘연: 영남의 시쓰는 사람들이 시험보던 자리)/…. 도산서원 뜰에 봄꽃이 흐드러지고 신록이 꽃을 시셈하듯이 아름다운 4일 "봄날 도산서원을 노닐며 도산별시를 추억하다(春日遊陶山憶別試)"라는 시제를 내 걸고 치러진 도산별과의 장원작 7언율시 앞부분 4구다. 이날 백일장에서는 영주에서 온 김호철씨가 장원을 차지했다.

도산별과(陶山別科)는 221년 전인 1792년 음력 3월5일 정조의 특명에 따라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科擧)다. '별과'라고 한 것은 1, 2차 시험인 초시(初試)와 회시(會試)를 거쳐 임금이 등위를 매기는 전시(殿試)로 치러지는 정규 대과(大科 3년에 한번씩 치르는 과거시험)와 달리 초시와 회시를 통합한 특별한 과거시험이라는 뜻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임금이 특명을 내려 시험을 보게 했다.

도산별과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조시대부터 당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며 당쟁의 폐해를 절감했다. 정조는 숙종대 이후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영남 남인세력을 등용, 탕평정국을 이루기 위해 도산에서 별시를 치르게 했다. 도산은 영남 남인의 영수인 퇴계 이황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다. 이는 정조가 영남 학문의 상징인 퇴계학을 국가적으로 중흥하려는 뜻도 있었다. 221년 전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별시에는 경상도 유생 7228명이 응시해서 3632명이 답안을 적어냈다. 당시 별시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 모여들어서 다 수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시험장을 강가로 옮기고 두 그루 소나무 사이에 과제를 걸었다. 당시 시제를 걸었던 곳을 시사단(試士壇)이라 하는데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소나무 숲이 없어지고 강 건너편 석축 위에 비석이 남아 있다.

도산서원에서 매년 '도산별시'라는 이름으로 전국한시백일장을 열어 왔다. 20회를 맞는 이날은 최초로 옛 도산별과 의식을 그대로 재현해 의미가 각별했다. 탕평인사와 국민통합의 뜻을 되새긴 이날 백일장에는 도포에 유건을 쓴 전국의 선비 110명이 참가해 스마트폰까지 동원해 기량을 겨루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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