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중심으로 좌 서애·우 학봉오늘 호계서원 복설 결의문 채택

400년 가까이 후학과 후손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논쟁인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석희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장은 "조선시대 영남지역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호계서원 복원 과정을 둘러싸고 문중과 후학간에 빚어졌던 병호시비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14일 밝혔다.

병호시비란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73년(선조 6년) 경북 안동시 월곡면에 건립된 호계서원(虎溪書院:당시에는 여강서원) 내에 1620년경 추가로 봉안된 학봉과 서애의 위패 가운데 어느쪽을 상석인 퇴계의 좌측(좌배향)에 둘 것이냐를 두고 촉발된 영남유림 내의 논쟁이다.

논쟁은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며 영의정을 지낸 서애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당시 학봉의 후학들은 스승이 서애보다 4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나다며 반발했지만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해 마지못해 따라야 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했던 논쟁은 1805년(순조 5년) 당시 영남의 4현으로 불리던 서애와 학봉,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신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서애와 학봉간 서열 문제가 불거지면서 재촉발됐다.

1812년 학봉의 후학들 사이에서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서애의 후학들이 반발 끝에 호계서원과의 절연까지 선언해버렸다.

서애파는 호계서원과 절연한 뒤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병론(屛論)을 형성하고, 학봉파는 호계서원을 독점하면서 호론(虎論)을 형성하면서 반목했다. 병호시비는 병산서원파와 호계서원파의 시비를 다툰다는 뜻이다.

흥선 대원군도 양측간 갈등의 골을 메우려 안간힘을 쏟았지만 실패하자 결국 호계서원을 철폐했다.

7년 뒤 같은 자리에 강당이 복원됐지만 이마저도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현재의 임하리로 옮겨졌다.

약 400년을 끌어온 논쟁은 결국 퇴계를 중심으로 좌배향에 서애를, 우배향에는 학봉과 대산의 위패를 모두 모시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지면서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 위원장은 "호계서원에 봉안될 퇴계와 서애, 학봉, 대산 등 4문중의 대표는 물론이고 지역 유림단체 대표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15일 경북도청에서 호계서원 복설 결의문을 채택키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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