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IN 마다가스카르 '90일간의 기적' (3)

마을 주민들과 합심해서 개발한 뒤 준공식을 앞둔 공동우물과 상수도 시설에 태극기가 선명하다.

마다가스카르는 상상이상으로 가난한 나라였다. 주민 대다수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문화나 복지정책이 시행된 현장은 눈닦고 찾아봐도 거의 띄지 않았다.

그러나 소아비나시는 포항의 새마을정신과 선진농업 기술을 전수한 뒤 "하면된다"는 신념을 심어준 결과 약 두달이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고국을 떠난지 두 달이 지나던 4월말 농업기술 전파와 집집마다 마을마다 뛰어 다니며 펼친 봉사활동은 주민들의 의식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생기를 가져다 준 새마을운동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취지를 조금은 이해하는듯 했다.

출국 전날 소아비나시 리구시장과 함께 석별의 정을 아쉬워 하며 함께 선물을 교환 한뒤 찍은 사진.

소아비나시 리구 시장과 공무원, 그리고 주민들도 그 무렵 스스로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안길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가정집과 관공서 사무실 방역작업을 도우며 무척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서로 얼굴을 익히기 시작했고 조금씩 친하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마을 공동우물을 파는 힘든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혼자 어떻게 할지 좀 걱정을 했는데 막상 시작하다보니 길 가던 주민 누구나 할 것 없이 굴착작업을 도와 주었다. 마치 우리나라 60년대 푸근했던 시골 인심이 되살아난 착각이 들었다. 70년대 초가집을 슬레이크로 바꿔 이던 지붕개량 사업처럼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작업도 모두가 솔선수범 하다 보니 한 집 두 집 모양새가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내일처럼 나서서 돕는 주민들을 보니 내심 고맙고 반가운 생각이 자주 들었다.

출국 당일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소아비나시청앞 광장에 줄지어 나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환송해 주는 모습.

우물을 거의 다 팠을 즈음에는 마치 소아비나시가 금방이라도 마다가스카르의 새마을 발상지로 우뚝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5월로 접어들 무렵에는 논농사 교육을 마친 터라 다른 곡식을 파종해보기로 작정했다. 대한민국에서 갖고 간 슈퍼옥수수 씨앗을 양껏 주민들에게 나누어 준뒤 마을 전 지역을 돌며 심는 방법을 가르쳤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옥수수씨앗을 받아든 주민들이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뛸 듯이 즐거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심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 자라면 훌륭한 식량이 된다는 사실을 설명한 뒤 마을 곳곳 밭은 물론이고 공터마다 찾아내 일일이 파종을 독려했다.

마을골목 벽면에 부착된 포항시기아래 주민들이 쉬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그 때 전 주민이 합심해 땀 흘려 심어둔 옥수수가 훌쩍 키를 넘길 만큼 자라 주민들에게 또 다른 소중한 식량자원이 되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5월에는 주민들이 아무런 작물을 심지 않고 내팽개쳐둔 빈 밭을 찾아 호박씨앗을 비롯 배추, 무, 상추 등 채소도 가능한 한 많이 심도록 강조했다. 나는 그 때 주민들과 함께 심은 채소는 이 나라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에게 국내외 판로를 개척케 해 또 다른 농가소득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할 일은 농민들에게 빠짐없이 논농사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마을 주택의 빈대소독을 마친후 집주인 말레오씨(47)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소독통을 등에 맨 이가 필자)

국내서 배운 대로 빈논에 무엇을 심을까 고심하다 사료작물을 심도록 권장하고 새로운 가축사양기술 등을 선보였다. 떠나올 무렵 싹이 튼 작물을 보니 내심 흐뭇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다 자란 모습을 보지 못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60여일이 지나면서 새마을운동 성과가 마을마다 뚜렷이 드러나자 주민들은 우리 대한민국 포항시를 만나 도시 발전이 타 도시보다 10년이나 앞당겨졌다고 모두들 고마워했다. 우리 나라를 70년대 일약 세계적인 부국으로 거뜬하게 이끌어 올린 새마을운동 정신과 한국의 훌륭한 선진농업기술을 소아비나시 농민들에게 잘 전파해서 이 나라가 오랜 가난을 벗어나 잘 살수있도록 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한국을 떠나온 지도 벌써 석 달이 접어들 무렵 솔직히 향수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우리 대한민국 그리고 포항앞바다 영일만 푸른 바다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무렵 박승호 포항시장에게 국제전화로 새마을운동 사업 성과와 농업기술 파급 효과 등 자세한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자 박 시장은 '무엇보다 건강하게 돌아오라'는 말로 격려했다.

3개월간의 봉사활동으로 얼굴이 검게 타고 사업성과가 드러나면서 귀국일이 다가오던 5월 23일 이곳 한인회 윤상선 회장과 임원들이 그간 이국땅에서 고생한다며 만찬을 열어주었다. 그 분들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소아비나시에 포항시에 고마움을 표시했고 앞으로 더욱 많은 지원과 협력을 당부했다. 포항시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대한민국 조국이 자랑스럽고 긍지가 대단해졌다고 모두들 고마워했다.

먼 이국땅에서 만난 동포들은 마다가스카르에 모처럼 불꽃이 옮겨진 대한민국의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더욱 번져 나가길 빌며 밤새워 술잔을 나누고 건배를 해댔다.

5월24일은 아침이 밝자마자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졌다. 드디어 소아비나 주민들과 작별의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짧은 기간 정이든 마을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가슴을 스쳤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출국 당일 소아비나시청앞 광장에 가보니 700여명의 주민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언제 누가 준비했는지 모를 반가운 태극기를 흔들며 서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광장으로 걸어가던 나를 바라보던 그들은 일제히 두손을 들고 대한민국 포항시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도 몰래 준비한 그들만의 환송식이었다. 그 순간 이국만리 타국에서 90일간 고생한 보람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화답하던 내 눈가에도 어느 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마 그날은 내 생애 최고의 기쁨과 보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으리라.

그들의 함성을 뒤로한 채 소아비나시를 떠나 안타나나리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나는 승용차안에서 우리 한국의 앞선 선진농업기술을 통해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포항시의 우수한 농업기술이 마다가스카르 소아비나시에서 부터 농업혁명이 일어나 마다가스카르 전역에 확산될 것을 염원하고 염원했다.

드디어 케냐 나이로비행 ME325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케냐 한국 대사관에서 김수현 영사가 친히 공항까지 마중 나와 그간 기아해결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격려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이로비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수속을 끝내고 대한항공 KE737여객기에 오르니 낯익은 우리 승무원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갈 적과 마찬가지 무려 15시간이나 걸리는 낮밤이 바뀌는 장시간 비행 끝에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자랑스런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90일간 함께 지냈던 소아비나시 골목 구석구석과 떠나올 때 시청광장에서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도열해서 눈물을 흘리며 환송해주던 그들의 손을 내 언제고 다시가서 덥석 잡으리라 결심을 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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