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호 수필가

먼동 트는 새벽 빛 고운 물살을 가르며 비단옷을 입은 세오녀가 버선발로 건너오는, 해와 달의 고장 동해에 매월 스무 이렛날(27일) 도구장이 열리고 있다.

칠순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이른 아침 텃밭에서 장거리를 만들어 새벽차를 타고 와서 무우, 파, 상추 등 건강한 먹거리를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할머니와 함께 새벽을 달려온 초여름 바람이 싱그럽게 얼굴을 스친다.

절름발이 아버지가 술지게미 잡수시고 유쾌하게 취하시던 장날, 우리엄마 박하 분 바르고 한껏 멋을 내던 그런 정겨운 장날이 왔건만, 간고등어 한 손 사들고 돌아가도 나를 반길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의 너털웃음 흩어지던 고향 대청마루엔 나를 그리움에 환장케 하는 달빛만 서성이고 뒷뜨락엔 하얀 박꽃이 어머니의 뒷모습마냥 허허롭다. 칭얼거리는 누이동생을 업고 동구 밖에 나가면 먼데 신작로에는 흙먼지만 포올폴 날렸다. 고개를 쭉 빼밀고 이제나저제나 올까 어머니를 기다린 사이 동생은 어느 새 등 뒤에서 잠이 들었다. 장날마다 청배 팔러간 어머니 손에는 항상 식은 보리개떡이 들려 있었다.

달이 환한 마차길을 고무신 한 켤레 사들고 절뚝이며 걸어오는 아버지의 남루한 모습이 가슴 뒷켠에 쓸쓸한 실루엣으로 남는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왁자하게 들리는 도구장은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이곳 저곳을 하릴없는 듯 배회하는 재미가 양푼이 비빔밥처럼 맛있다.

저기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장을 보러온 한 무리의 부녀자들은 인근 군부대 사모님들이시다. 싱싱한 채소며 살찐 감자를 사며 흔쾌히 지갑을 열고 신이 난 할머니는 덤으로 채소 한웅큼을 더 주신다.

도회지 마트의 획일화 되고 기계화된 것 같은 상품에 비해 모양은 좀 울퉁불퉁해도 시골 정취가 물씬 나는 정이 묻어 있기에 물건 사는 분들은 연신 싱글벙글 흡족한 모습들이다.

대한민국 친환경 농산물 마을로 지정된 노다지 마을에서 생산되는 유정란 달걀이며 토마토, 감자 등 웰빙 농산물, 동해안에서 건져 올린 최고의 보양식 검은 돌 장어, 농수산 분야 대한민국 명품브랜드인 '영일만친구'로 포장된 신토불이 농산물 등 그야말로 보기엔 그냥 시골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도구 장터이다. 집안일 보다 면사무소의 봉사일이 더 신나는 봉사단체회원들, 새마을부녀회가 장날마다 삶아내는 국수 맛은 일품이다. 물론 무료다. 마음이 허전한 그대여, 행여 살아가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거든 도구장에 와서 어머니가 끓여주는 것 같은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먹어 보라.

파전과 국수를 먹으며 무명가수가 토해내는 노래장단에 손뼉을 치며 흥겨워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깊게 패인주름이 저녘 노을처럼 평화롭다.

27일은 도구장에 와 보라.

시끌벅적하지만 유쾌하고 소란하지만 재미있는 곳. 사람들이 파는 것은 '시골 인심'이며 사람들이 사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고향 맛'이라네.

어서 와 서로의 가진 것을 나누어 보세.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란 것을 알려주는 도구 장터에서 장바구니 가득 풍성한 우리네 인정을 담아 가보세.

삶의 맛이 피어나는 도구장터는 항상 싱싱하다, 영일만의 언저리, 도구에서 푸르른 계절이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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