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모니카 수필가

언니가 있다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을 받은 것이다. 나에게는 그렇다. 나에게 언니의 의미는 항상 엄마의 부재를 채워주는 존재 이상이었다. 그래서 자주 서울을 갔다. 바쁘다는 핑계로 오래 머물지는 못하지만 그 곳에 있는 동안만은 세상을 잊은 듯 행복해했다. 언니의 배려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헤아려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었다. 편안함에 젖어 있다가 문득 포항 가족이 생각나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포항에 도착할 때 쯤 서울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잊어버리고 간 물건 없나?' '아니 없는데' '니 뭘 입고 서울에 왔었지?' 아차 코트! 포항에서 입고 간 코트는 놔두고 언니가 준 코트만 덜렁 입고 나섰던 것이었다. 언니가 택배로 부친다는 걸 절대 그러지 말라며 그 핑계 삼아 또 서울을 가곤 했다. 그리고 내려올 때 쯤 또 언니의 전화를 받는다. '너, 또 뭘 놔두고 갔다.' '엥 이번에는 다 챙겼는데' '생각이 안나나? 니 목걸이~' 에그머니 또 걸렸다.

에휴, 덜렁뱅이. 서울 올 핑계거리, 또 생겼다며 언니는 크게 웃는다. 건망증 때문에 나는 늘 그렇게 웃기고 다닌다.

몇 해 전 경주 남산에 여자 다섯 명이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운전을 하려는데 곳곳에 무질서하게 차들을 주차해놓은 탓에 뒤로 후진해서 차를 빼기가 고약했다. 그런데 덩치가 큰 G형님이 '내가 후진하는 걸 봐 줄게'라며 차 문을 열고 나갔다. 그 형님의 지시대로 겨우 차가 빠져 나왔다. 황당한 일은 그 다음이었다. 안전하게 차가 빠졌다는 표시로 G형님이 차 뒤편을 탁탁 두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그대로 차를 몰았고 같이 갔던 일행들은 수다 떨기에 정신이 없었다. 포항에 다 와서야 뭔지 허전함을 느꼈던 한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근데 G가 어디 갔노?' 하는 것이 아닌가. '에구구, G행님을 남산주차장에 놔두고 와삣다. 이 일을 우야노?' 우째 이런 일이. 경주에서 포항 올 때까지 아무도 그 큰 덩치의 부재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배가 아플 정도 웃었다. 다시 경주로 차를 몰아 간 나는 운전했다는 죄목으로 땀범벅으로 씩씩대는 형님을 달래느라 혼줄이 났다.

내 건망증은 아마 미련일지도 모른다. 머물고 싶은 곳에 내 의식들을 남겨두고 나의 기억은 비워두려는 무의식적 행위가 바로 건망증이 아닐까하는 생각. '잊는다'는 것은 '없어진다'가 아니고 '현실상황과 실체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잠시 기억에서 비켜간다'는 것이니 내 건망증은 매우 편리한 방어기제인 셈이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기억을 건져 올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건망증이 없으면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또렷한 의식만 있다면 숨 막힐 것 같다. 고통스러운 일이나 상처가 되었던 일들은 깨끗이 잊어버리면 좀 좋은가. 잠시 보류해 두는 듯 건망증의 신세를 져도 좋으리. '판단력이 부족하면 결혼을 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면 이혼을 하며, 기억력이 부족하면 재혼을 한다.'는 말이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게 맞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건망증 때문에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아파했던 것들이 감각이 무뎌져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이 되었던 일부의 기억이 사라진 탓이다. 고마운 일이다. 건망증 때문에 실없는 사람이 될 때가 많지만 그래도 건망증 때문에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은 것을 어쩌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핸드폰 벨 소리, 어디다 폰을 놔두었더라? 며칠 전 반찬 그릇 대신 냉장고에 폰을 넣어놓고 그렇게 찾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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