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이 따뜻하다.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앉아 있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문득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짚둥우리 속에서 막 꺼낸 달걀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게 안 믿어질 만큼

 희고 따뜻하다, 매끈하다. 

 혓바닥 아래 고인 침처럼 상긋하게

 피어난 옥잠화의 흰 살결.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난 꽃들,

 그 향기도 대저 항문의 그것이니 

 쿰쿰한 엄마를 열고 나온 신생의 애물단지들아.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따뜻한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슬쩍, 만져본다

<감상> 생명의 근원적 모성애를 '따뜻한 종이컵'에서 발견한다. '종이컵' 뿐만이 아니다. '옥잠화'는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나며 '달걀'은 어떤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것이다. 시인은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 앉아 있는 자판기'의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따뜻한 종이컵'에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느낀다. (서지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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