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미국 남북전쟁은 5년 가까이 계속됐다. 하지만 북군이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이 전쟁은 양측의 합의가 가능했고 초기 수주 이내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북군이 승리의 기회를 놓친 것은 한 장군의 고집불통이 화근이었다. 1861년 7월 리플리 장군은 해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장비를 구입한 병기국을 인계받았다. 당시 67세의 리플리는 1812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 3년간 영국군과 전쟁을 치른 노장이었다. 그는 병기국장이 되기까지 30년 넘게 군수업무를 담당했었다. 그를 병기국장의 자리에 앉힌 것은 전임자가 무능하고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최신형 머스킷소총을 지원하겠다고 리플리 장군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리플리는 영국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개인적인 감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에겐 영국과 치른 독립전쟁의 앙금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건 공적인 거절 이유는 '국산품 애용'이었다. 리플리는 타고난 고집불통에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변화불감증' 인물이었다.

리플리에게 거절당한 영국은 재빨리 남군쪽으로 달려갔다. 남군은 영국이 제공한 성능이 월등히 뛰어난 머스킷총으로 북군과 싸울 수 있게 돼 그 여파로 초기 두 전투에서 북군에 승리할 수 있었다. 리플리는 병기국장자리를 떠날 때까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무기를 고집스럽게 거절했으며 심지어 기관총 구입도 못하게 온몸으로 막았다. 리플리의 고집불통은 가장 현대화된 무기와 장비도입을 막음으로써 북군의 승리를 희생시켰던 것이다.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체질화 돼 있던 리플리의 고집이 북군의 승리를 오랫동안 지연시켜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한 달 넘게 장외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민주당과 김한길 당대표를 보면 초기에 종전 가능성이 있었던 전쟁을 장기전으로 몰고 간 리플리의 고집과 흡사하다. 국회를 내팽개친 민주당의 장외투쟁에 대해 국민 70%가 반대하는데도 김한길 대표는 "장외투쟁 강도를 높이겠다"고 외쳐 고집불통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환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민의 고통도 좀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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