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헌강-정강왕릉

경주시 남산동 산 55 소재 사적 제187호 신라 헌강왕릉

헌강왕릉, 높이 4m·지름 15.8m 원형봉토분·4단 둘레돌

1993년 내부 조사…돌문·문지방·폐쇄석·묘도 등 확인

정강왕릉, 2단 둘레돌·상석·육각형 석단 등 놓여

인근 화랑교육원·서출지·통일전 등도 둘러볼만 해

경주시 남산동 산 53 소재 사적 제186호 정강왕릉

제46대 문성왕과 제47대 헌안왕은 제25대 왕인 진지왕릉 때에 소개하였고 제48대 경문왕릉은 전해지지 않아 제49대 헌강왕릉으로 향했다. 망덕사지를 지나니 화랑교육원이 나왔다. 화랑교육원을 지날 때마다 남편은 추억에 잠긴다. 학생회장직을 맡았던 고등학교 시절 교육을 받으러 왔던 곳이라며 산에 올랐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헌강왕릉 이정표가 산으로 향하고 있다. 주차가 마땅치 않아 50m쯤 더 가니 정강왕릉 이정표가 또 산으로 향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통일전의 주차장이다.

헌강왕릉에 가기 전에 통일전과 서출지를 먼저 둘러보기로 하였다. 통일전에는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회랑에는 삼국통일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삼국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있는 곳이어서인지 엄숙함이 느껴진다. 통일전을 나와 서출지로 갔다. 제3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의 목숨을 구한 사금갑의 전설이 서려 있는 연못이다. 여름의 끝자락에 있어 청아한 연꽃의 자태는 볼 수 없지만 부레옥잠으로 보이는 수생식물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연못가에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 지은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곳에 서서 연못을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침이면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볼 수 있겠지.

서출지를 잠깐 둘러보고 헌강왕릉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길바닥에는 소나무 뿌리기 얼기설기 얽혀서 마치 세상사를 보는 듯하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혼자는 살 수가 없고 소나무 뿌리처럼 이리저리 얽혀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는다.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불어도 이 숲은 끄덕도 하지 않으리. 그 길이 80여 미터 계속된다.

소나무 숲속에 둘러싸인 헌강왕릉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형태의 정말 단아한 모습이다. 잘 다듬어진 길쭉한 돌로 네 단의 둘레돌을 두르고 위에는 잔디를 입힌 원형봉토분이다. 봉분 앞에는 몇 개의 긴 돌로 만들어진 상석이 있다. 옆에 표지석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다른 장식물이 없는 단출한 왕릉이다.

신라 헌강왕릉(新羅 憲康王陵)

사적 제18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m, 지름 15.8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cm, 너비 128~9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남편은 들어서 알고 있다며 안내판을 읽듯이 설명을 이어간다.

1993년에 홍수가 나서 봉분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내부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었고 석실 안에는 두 장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도 있었다. 아마 시상석 위에 시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미 도굴이 된 능이라서 부장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헌강왕이 재위한 때에 서라벌에는 모든 집들이 기와집이었고, 밥은 숯으로 짓고, 거리에는 노래 소리로 가득했던 태평성대였으니 신라가 최고점에 이른 시기였다. 신하들이 태평성대를 이룬 것은 왕의 덕이라고 하니까 헌강왕은 신하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덕이 있는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경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를 읊어본다. 처용은 동해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로 서울로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왕은 미녀를 아내로 삼게 해주었다. 그의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밤마다 역신이 그 집에 몰래 와서 자고 갔는데 다그치지 않고 이 노래를 지어 부르니 역신이 감동하여 문간에 처용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용서의 미덕을 여기서 보는 것 같다. 후후.

아름다운 숲길을 내려와 정강왕릉으로 향했다. 신라의 미소를 띠고 있는 막새기와 모양의 정강왕릉 이정표에 100m라고 적혀있다. 그 길도 소나무 뿌리가 드러난 아름다운 숲길이다. 갑자기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 미안해진다.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기 위해 땅속에 묻혀있어야 할 뿌리가 아닌가? 길에만 드러난 것을 보면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끄집어낸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부르짖는 자연과 함께 하려면 가는 길이 다소 불편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주어야 할 것 같다. 그 길이 100m다.

헌강왕릉과 쌍둥이 같은 무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단 둘레돌이 두 단이라는 것이 다른 점이다. 앞에는 상석이 놓여있고 그 위에 반듯한 육각형의 석단도 있다.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헌강왕의 동생이다. 재위1년 만에 병으로 죽으면서 누이동생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안내판에도 간단한 설명이 나와 있다.

정강왕릉 (新羅 定康王陵)

사적 제186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

이 능은 경주 남산(南山)의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 부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신라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김황)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m, 지름 15m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둘레돌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형 깬돌(割石)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憲康王)의 아우로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정강왕릉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은 내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흙의 보호를 받지 못한 소나무 뿌리가 군데군데 끊어지고 패여 있다. 되돌려 놓아야할 자연의 모습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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