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지금도 나는 젊은 때나 마찬가지로 많은 꿈을 꾼다.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 꿈은 내게 큰 축복이다."

올해 여든, 내년이면 시력(詩曆) 환갑을 맞는 '농무'의 시인 신경림(1935~)이 열한 번 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냈다. 지역 서점에 시집을 사러 갔더니 매대에 그의 시집이 없었다. 지방도시라서 아직 시집이 오지 않았나 해서 서점 점원에게 물어보았더니 보내온 시집이 다 팔려 재고가 없다고 한다. 질박한 서정과 꾸밈없는 언어로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시를 써온 그를 지역의 독자들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다른 서점으로 가서 시집을 샀다. 하룻저녁 내내 아껴가며 읽은 시집에는 사실 새로울 것도, 유별난 것도 없었다. 현란한 비유도 없고, 어려운 축약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이 시는 시인이 1993년 펴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 실으려다 마음에 차지 않아 빼 놓았다가 다시 써 낸 것인데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 신경림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의 삶은 중국 시성(詩聖) 두보를 닮았다. 인간의 고통를 늘 가슴에 품어 연민의 시어로 위로하고, 평탄치 않은 삶의 불우에 매몰되지 않아 '우리시대의 두보'라 불린다.

"나는 깨지 않으리 이 꿈에서,/ 비록 이 꿈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시 '몽류도원' 끝 부분) 시인은 이미 인생의 먼 길을 와서 '사불휴(死不休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두보의 말)'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는 오만과 독선을 버린 시"라는 팔순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면 오히려 그의 눈이 맑아지고 귀는 순해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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