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점수만으로 평가하는 인적자원 가치판단 기준, 학문의 정체성 무너뜨려

김찬곤 경북과학대학 교수

최근 소위 '전·화·기'로 불리는 이공계 대표학과들의 취업률이 두드러지고 있다. '전자·화학·기계공학'의 첫 자를 딴 이 학과들은 대학가의 취업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현장분위기다. 정부의 이공계 우대정책과 산업계의 이공계 선호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융·복합 시대를 맞아 시대적으로 이공계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이공계에 대한 산업계의 프리미엄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공계출신들을 영업직으로 채용한 대기업이 있다든지, KAIST 수학과 출신의 57%가 금융계에 취업을 했다든지, 어느 증권회사의 신입사원 1/3이 이공계 출신이라든지 하는 언론보도도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를 방증한다. 억대 연봉자를 분류해보았더니 '전·화·기'를 중심으로 한 이공계 출신이 다른 분야보다 눈에 띄게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소위 '문·사·철'로 대변되는 '문학·사학·철학'과의 취업률은 상대적으로 크게 저조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취업률 저조는 우수 인재들의 진입을 주저하게 만들고 우수인재들의 기피는 곧 그 분야의 장기침체를 불러오게 되는 악순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풍토보다 어떻게 하면 연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는가가 출세 기준으로 부각시킨 최근의 사회분위기의 결과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100대기업의 전문경영인은 당연히 상경·사회계열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지난 해 말 이공계 전공자가 48.7%로 상경·사회계 출신자 44.0%를 앞질렀다는 보도는 큰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동안 기존의 비이공계 CEO가 훨씬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최근의 이런 결과는 그만큼 이공계출신이 일선 경영자로서의 지위를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차제에 산업계의 '전·화·기' 수요를 굳이 못마땅해 할 까닭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길만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학문의 정체성에 대한 가치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 '전·화·기'에서는 전문경영인교육과정이 없다. 글자 그대로 전자·화학·기계공학 등의 국가 기간산업의 발전을 선도하는 두뇌를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경영학에서 전자학 등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그만큼 자기 학문에 몰두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융·복합이 대세라지만 음악과 출신의 체육학종사 장려가 어색한 이치와 같다. 따라서 '전·화·기'는 자기분야 고유의 학문 정체성이 있을진대 바로 이에 충실하도록 하는 사회분위기가 필요한 것이다.

어느 대기업 인사부장은 "이공계 지원자의 평균 토익점수가 900점이 넘었고, 평균 950점에 달했다. 그래서 영업직으로 이공계 출신을 많이 뽑았다"고 자랑하였다. 대학가에서 토익특강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생들의 인기가 높은 반면 '문·사·철' 특강은 수강생이 적어 폐지되는 사례가 흔한 일이 되어버린 현실이라고 하지만 토익점수만으로 인적자원의 모든 절대적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현실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산업의 고도화에 따른 융·복합의 필요만으로 학문의 정체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화·기'와 '문·사·철' 제각각의 특성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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